그놈은 어느새 내 앞에 다가가 섰어요. 그리곤 피가 묻은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씹어 먹겠다는 듯이 포효했어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한 셈치고, 있는 힘껏 보드카 병으로 그놈의 머리 위를 내리쳤어요. 병은 기분 좋게 깨지고, 보드카가 그놈 몸에 흠뻑 튀었어요. 그놈은 그 충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왼손으로 휘갈겼어요. 이번에도 예외 없이 큰 충격과 함께 차있는 쪽으로 나가 떨어졌어요. 다시 한 번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느껴졌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미리 각오하고 있던 터라 전보다 일찍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어요. 그놈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어요. 나는 아픔을 참으며, 오른손으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았어요. 하지만, 있어야 할 라이터는 없었어요. 그 순간 아까 차에서 불을 붙일 때, 내 라이터를 썼다는 것이 생각났어요. 갑자기 절망감으로 휩싸였어요.

불을 붙일 것이 없다니.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놈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어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필사적으로 부을 붙일 만한 것이 있나 찾아봤어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찾을 수도 없었어요. 그놈이 일 미터 정도 앞으로 다가올 때 가지 아무 것도 찾질 못했어요.

순간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켜진 것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차안에 시거 잭이 떠올랐어요. 시동을 걸고 시거 잭을 누르면, 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시간을 벌기 위해 온몸으로 그놈에게 부딪혔어요. 그놈은 갑작스런 내 공격에 충격을 받고 뒤로 벌러덩 자빠졌어요. 나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재빨리 몸을 돌려 절뚝거리며 차를 타기 위해 갔어요. 뒤를 돌아보니, 그놈도 버둥거리며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어요. 간신히 차로 갔지만, 차의 앞부분이 숲에 처박혀 있어 우선 뒷문으로 올라탔어요. 문을 닫고 잠그자마자, 핸들 쪽으로 손을 뻗어 시동을 걸었어요. 그런데 시동이 잘 안 걸리는 것이었어요. 밤새 헤드라이트를 켜놔 배터리가 거의 다 방전됐었나 봐요. 미친 듯이 키를 돌리려 했지만, 무서움 때문인지 손이 덜덜 떨리고 키마저 잘 안 잡혔어요. 그놈은 지금이라도 차문을 열고 나타나 내 목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어요.

몇 번 실수 하고나서, 간신히 키를 잡았어요.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걸었죠. 시동 음이 얼마나 경쾌하던지. 차가 시동이 걸렸어요. 나는 몸을 구부려 시거 잭을 눌렀어요. 하지만 시거 잭은 금방 달궈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초조하게 시거 잭이 달구어지기를 기다리는데, 창문에 그놈이 나타난 것이 보였어요. 그놈은 주저하지 않고, 주먹으로 차 유리를 깼어요. 그리곤 나를 잡으려 했어요. 나는 움직일 수 있는 오른발로 필사적으로 발길질하며 그놈에게 저항했어요. 그놈은 내 저항을 개의치 않고, 깨진 차창으로 손을 넣어 잠긴 문을 열려고 했어요.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놈의 손을 발로 찼지만, 자세도 불안정하고 해서 저항이 될 수 없었어요.

그놈이 문을 여는 순간, ‘척’ 하는 소리와 함께 시거 잭이 튀어나왔어요. 나는 오른 손을 뻗어 시거 잭을 빼서, 나의 다리를 물어뜯으려던 그놈의 얼굴에 지졌어요. 다음 순간 ‘확’ 하는 소리와 함께 그놈은 불이 붙었어요. 나도 그 열기에 몇 군데 살이 뎄지만, 그런 것을 상관할 때가 아니었죠. 그놈은 불이 붙자 괴로운 듯 몸부림쳤어요. 하지만 내 발을 잡은 손은 끝까지 안 놨어요. 내 발에도 불이 붙는 듯 했어요. 나는 힘껏 발을 뿌리치고, 체중을 실어 그놈이 기대고 있던 차문을 열었어요. 그놈은 문에 밀려 불이 붙은 채로 2,3미터 아래인 도랑으로 넘어져 굴러갔어요. 도랑에 굴러 떨어진 그놈은 몸부림치면서, 내게 다시 기어 올라오려고 했어요. 하지만 웬일인지 그놈에 붙은 불은 더욱더 활활 타올랐어요. 마치 누군가가 기름을 붙고 있는 것 같았어요. 모르죠. 숲에서 무언가가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즐기며 도와주고 있었는지.

몇 분이 지났을까.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치던 그놈은 온몸을 태우고 힘없이 쓰러졌어요.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움직일 수 없었어요. 이윽고 그놈이 쓰러지자, 내면 속에서 나도 모르게 환희를 느꼈어요. 미움, 증오, 복수 등의 감정이 살았다는 기쁨과 뒤엉켜 이상야릇한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면,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가장 큰 감정은 그놈을 처치했다는 통쾌함이었어요. 내 몸속에 흐르던 짐승 같은 무자비함이 친구를 죽여 놓고도 즐거움을 느끼게 했나 봐요.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제기랄.

여하튼 나는 진수를 태워버리고 나서, 갑자기 몰려오는 피로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어요. 잊었던 온몸의 고통이 다시 느껴졌어요.

차에 기대어 한숨을 쉬었어요. 경아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대로 있다간 또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이유 모를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그 기운과 함께 갑자기 섬뜩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영이가 쓰러져있던 곳을 보았어요. 나는 전율과 함께 섬뜩함을 느끼고,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세영이의 시체가 사라졌던 거예요. 머리에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어요. 분명히 거기 있어야 할 세영이의 시체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에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안 보이는 것 같았어요. 온몸이 덜덜 떨리면서, 무서워지는 것이었어요. 우리 말고 여기에 누군가가 있다는 의심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었어요. 그것도 무시무시한 그 어떤 것이. 분명히 내가 확인했을 때 세영이의 심장은 뛰지 않고 있었고, 겉에서만 봐도 죽은 것이 분명했는데, 없어진 것이에요. 왼팔과 다리에 고통은 점점 심해졌지만, 여기서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더욱 강해졌어요. 주위를 경계하며, 경아를 찾아볼 생각을 했어요. 마음 속 깊은 곳에 불길한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어요. 진수도 저런 꼴로 날뛰었고, 세영이도 그렇게 되었는데 경아라고 무사할리는 없었어요.

경아에 대한 불안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는데, 갑자기 차에서 쾅쾅하는 소리와 함께 흔들림이 느껴졌어요. 얼마나 놀랐던지. 놀란 나는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았어요. 트렁크에서 나는 것 같았어요. 나는 차 안에서 무기될 만한 것과 키를 찾으려 했어요. 아까 차 안에서 들어올 때는 너무 급박한 상황이어서 잘 몰랐는데, 실내 등을 켜보니, 차 안도 끔찍할 정도로 엉망이었어요. 내가 도움을 청하러 갈 때만해도 멀쩡했는데, 지금 보니 사방에 피가 튀어 범벅이 되어있고, 혈투가 있었던 것처럼 시트도 여기저기 날카롭게 찢겨 있었어요. 섬뜩함이 느껴지더군요. 경아에 대한 희망도 사라져가는 것 같았어요.

간신히 자동차 키를 뽑고, 바닥에서 피 묻은 스패너를 찾아냈어요. 겁을 억누르고, 스패너를 집어 들고 트렁크 앞으로 다가갔어요. 심호흡을 하고 키를 트렁크에 꽂았어요. 가만히 들어보니 안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와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경아일거라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으나, 미쳐 날뛰던 진수의 모습이 머리를 스치자, 한편으로는 몹시 불안했어요.

긴장이 되었는지, 트렁크를 열기 전에 온몸이 땀에 젖는 것 같았어요. 키를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어요. 스패너를 들고 대비를 하고 싶었으나 왼팔을 못 써 할 수 없이, 오른 겨드랑이에 껴놓고 오른손으로 트렁크를 열어야했어요.

심호흡을 하고, 트렁크를 열었어요. 열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어요. 트렁크가 열리자 뭔가가 벌떡 일어섰어요. 순간 놀랐지만, 경아였어요. 경아는 나를 보고, 다짜고짜 안았어요. 그리곤 막 울더군요.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무서웠지?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이렇게 말하고 경아를 살펴보았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은 퉁퉁 부어있었고, 얼굴은 아직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어요. 경아도 호된 일을 겪었는지 온 몸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어요. 다행히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어요. 경아는 나의 엉망이 된 몸을 보고 놀랐지만, 나는 진수와 세영이의 그 끔찍한 죽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어요. 우선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했어요. 잘못 생각했죠. 우선 거기서 벗어났어야 하는데. 바보같이. 여하튼 우리는 서로의 궁금증을 해결하려 했죠.

“걱정 마. 난 괜찮아. 그건 그렇고, 내가 떠난 다음에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거야?”

경아는 아직도 무서운지, 덜덜 떨면서 얘기를 시작했어요.

“재혁 씨가 떠난 후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세영 씨는 자기가 아픈 와중에도 나를 안심시키려 했어요. 그리고 앞자리에 누워 조수석의 진수 씨를 돌보았어요. 나보고는 걱정 말고, 뒷자리에서 눈 좀 붙이라고 했어요. 재혁 씨가 곧 돌아올 테니.

진수 씨는 계속해서 신음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했어요.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어요. 무척 걱정되었어요. 점점 심해지더니, 헛소리까지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기 힘들었어요. 발음이 부정확하기도 했지만, 난생 처음 듣는 것 같은 무슨 말을 내뱉기도 했어요. 점점 진수 씨는 큰 소리로 헛소리하기 시작했어요. 세영 씨도 자기 몸이 그렇게 아팠지만, 진수 씨가 너무 심하니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 못해 하는 것 같았어요. 진수 씨는 마치 누군가와 심하게 다투는 것처럼 격하게 소리치기 시작했어요. 죽음이라는 단어와 숲이라는 단어가 언뜻 들린 것 같았어요. 또 다 죽는다, 라는 얘기도 많이 했어요.

점점 무서워졌어요. 진수 씨의 헛소리는 심해지기 시작했어요. 딴 사람의 목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짐승 같은 소리도 내기 시작했어요. 가래 끓는 듯한 야수의 소리도 냈어요. 그리고 전혀 딴사람의 목소리로 소름끼치는 얘기를 했어요. 그 얘기는. 아니, 아무 것도 아니었어요. 세영 씨도 당황한 것 같았어요. 진수 씨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막무가내였어요. 그러더니 그 끔찍한 일이 시작된 것예요. 누워서 헛소리하던 진수 씨가 갑자기 그 심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난 거예요. 급격히 움직이니, 진수 씨의 상처는 터져서 피가 튀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너무 놀랐어요. 그러나 그 다음 진수 씨의 행동은 너무 끔찍했어요. 갑자기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울부짖음을 짖더니, 갑자기 옆에 놀라서 보고 있던 세영 씨의 팔을 물어뜯는 것이었어요. 흐흑.

지금도 그 장면만 생각하면. 너무너무 놀라 기절할 것 같았어요. 나도 모르게 차문을 열고 나왔어요. 뒤에서는 세영 씨의 처절한 비명소리와 기분 나쁜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차는 심하게 요동쳤어요. 간신히 차 밖으로 나왔으나, 발이 후들후들 떨려 움직일 수 없었어요. 차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차창에 사방으로 피가 튀었어요. 너무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았어요. 그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더니, 피투성이가 된 세영 씨가 쓰러지듯이 나왔어요. 그러더니 나보고 빨리 피하라고 외쳤어요. 하지만 나는 계속 움직일 수 없었어요.

간신히 트렁크 있는 데까지 움직였어요. 그르릉 소리가 들리더니, 진수 씨가 세영 씨를 따라 나오는 것이 보였어요. 그때 진수 씨의 모습은 평소에 그렇게 밝던 모습이 아니라, 악마모습 그 자체였어요.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입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굶주린 짐승처럼 세영 씨를 쫓아 나왔어요. 기절 하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세영 씨가 내 옆으로 와서, 나를 트렁크에 밀어 넣었어요. 나는 엉겁결에 트렁크에 밀려들어갔어요. 마침 트렁크는 아까 먹을 것 꺼낸다고 열어놓은 상태였거든요. 트렁크가 세영 씨에게 닫히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가 본 모습은 진수 씨가 세영 씨를 고양이가 쥐를 잡아채듯이 덮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세영 씨의 처절한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깜깜한 트렁크에서 기절했어요.

얼만큼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이 들었어요. 그리고 진수 씨의 그르릉 소리가 가까이오고, 누군가가 차에 탔는지 차가 흔들리고, 뭔가가 타는 듯한 소리가 들렸어요. 소름끼치는 울부짖음이 길게 메아리치고 조용해졌어요. 나는 재혁 씨가 온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트렁크를 열심히 두들긴 거고, 재혁 씨가 트렁크를 열고 나를 구해준 거예요. 그건 그렇고 재혁 씨는 왜 그렇게 심하게 다친 거죠? 진수 씨와 세영 씨는 어떻게 된 거예요?”

나는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어요. 경아의 얘기를 들어도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왠지 모르게 경아가 내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어요. 경아의 무서움과 충격을 줄이기 위해, 진수와 세영이의 얘기를 나중에 하자며 빨리 여기를 떠나자고 했어요. 하지만 경아는 진수와 세영이가 어떻게 된 거냐고 집요하게 물었어요.

그때였어요.

경아의 표정이 갑자기 끔직한 것을 본 것처럼 일그러졌어요. 그리고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어요.

“까야악! 재혁 씨!”

경아의 갑작스런 반응에 놀라기도 했지만, 뒤에서 싸늘한 느낌이 들어 돌아서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어요. 눈앞에 피투성이가 된 세영이가 서있는 거예요. 분명히 죽은 것을 확인했는데. 그런데 세영이의 눈빛은 아까 미쳐 날뛰는 진수의 눈빛을 하고 있었어요. 나는 가슴이 옥죄는 듯한 공포를 느끼고, 움직일 수 없었어요. 세영이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어요. 경아의 비명소리는 계속해서 내 귀에 울리고 있었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어요. 겁에 질린 겁쟁이일 따름이었죠.

세영이, 아니 그 괴물은 등골이 오싹한 표정과 괴성을 지르고, 나를 집어던졌어요. 저항은커녕 그냥 붕하고 떨어져 나갈 뿐이었어요.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아스팔트 바닥에 심하게 내동댕이쳐졌어요. 정신을 잃을 뻔 했으나, 그런 와중에도 경아가 걱정돼서 간신히 몸을 추스렸어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면서, 충격으로 흐릿해진 눈의 초점을 맞췄어요. 그때 정말 가슴을 찌르는 듯한 경아의 비명소리가 메아리 쳤어요. 경아 쪽을 바라보니, 제기랄, 그 괴물이 경아의 어깨를 물어뜯고 있는 것이었어요.

머리에 피가 치밀고 눈에 불이 튀는 것 같았어요.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말이 맞을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다짜고짜 그 괴물을 향해 몸을 날려 덮쳤어요. 그때 다리와 왼팔의 통증은 까맣게 잊고 있었죠. 강하게 부딪히자, 그놈은 경아를 놓치고 내 몸에 밀려 열려진 트렁크 안으로 상체가 들어갔어요. 그놈은 괴성을 질러댔죠. 나는 정신없이 그놈의 다리를 들어 트렁크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 힘을 다해 트렁크를 닫으려했어요. 하지만, 그놈은 그 와중에도 손을 틈 사이로 집어넣어 트렁크가 닫히지 않게 했어요. 트렁크가 닫히지 않자, 나는 너무 무서웠어요. 그놈이 튀어나와 나와 경아를 물어뜯어 죽여 버릴 것만 같았어요. 당황한 나머지, 그놈의 힘에 밀려 트렁크가 열릴 뻔 했어요. 하지만, 그놈이 그 무시무시한 힘을 쓰기 전에, 그 놈의 손가락이 틈 사이에 껴있는 것을 보고, 나는 있는 힘껏 뚜껑을 다시 한 번 부서져라하고 닫았어요. 트렁크가 제대로 닫히면서, 내 바지로 피가 튀었어요. 그놈의 손가락이 잘려져 나간 거예요.

안도감도 잠시뿐, 그놈은 트렁크를 부서질 듯이 두들겨 댔어요. 놀랍게도 그놈의 힘이 얼마나 센지, 트렁크가 곧 열릴 것 같았어요. 무슨 방법을 찾아내야 했어요. 트렁크가 열리면 나와 경아는 끝장이었어요. 트렁크는 계속 쿵쾅대고 당장이라도 부서져 나갈 것 같았어요.

다급한 순간 휘발유 냄새가 나는 것이 느껴졌어요. 차 밑을 보니 휘발유가 새는지, 흥건하게 고여 있었어요. 사고 날 때부터 조금씩 새고 있었나 봐요.

차를 통 치로 태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불이 없는 거예요. 라이터도 없고, 성냥도 없고. 트렁크는 충격을 받아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놈의 소름끼치는 소리도 코앞에서 들렸어요.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불을 지를 방법이 없었어요.

“제기랄! 불! 불이 필요해!”

너무 다급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어요. 하지만 답답하기만 하지 방법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때였어요.

“재혁 씨, 이것 써봐.”

쓰러져 있던 경아가 자기 상처의 아픔도 참고, 당황해 하고 있는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었어요. 나는 놀라 무엇인가 하고 받아 보았죠. 딱성냥이었어요. 의아해하고 있는 나에게 경아가 힘겹게 설명해주었어요.

“아까 휴게소에서 불꽃놀이하자며 산 불꽃에 들어 있던 거야.”

그 딱성냥 하나가 얼마나 반가운지. 나는 제발 켜져라 마음속으로 빌면서 성냥을 그었어요. 트렁크는 거의 부서져 나가고 있었어요. 불이 확하고 붙었어요. 나는 오직 불을 붙이자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성냥불을 고여있는 휘발유에 떨어뜨렸어요. 불은 ‘쉭’ 소리를 내며 빠르고 아름답게 차를 태우기 시작했어요. 나는 타오르는 불을 보며 경아를 부축하고 뒤로 피했어요.

불타는 차에서는 그놈의 고통스런 비명소리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찢어지게 들렸어요. 쾅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치솟았어요. 그놈의 비명소리를 지워졌지요. 차의 연료통이 터지는 소리가 같았어요. 우리는 다 끝났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어요. 차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트렁크 뚜껑이 쾅하고 열리면서, 그놈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소름끼치는 괴성을 지르며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었어요. 나와 경아는 그 끔직한 모습을 보고, 두려움을 느끼며 뒷걸음질 쳤어요.

그놈은 몇 발짝 우리를 향해 비틀비틀 걸어오다가 무릎을 꿇더니, 힘없이 쓰러졌어요. 불은 그놈을 끝없이 태울 것처럼 타고 있었어요. 그놈이 쓰러지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온 몸에 피로가 몰려오고 다친 곳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맥이 탁 풀리면서 주저앉았어요. 경아도 그놈에게 물린 곳이 아파오는지, 내게 기대며 주저앉았어요. 활활 타는 차와 그놈의 시체를 바라보면서,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것은 나의 어리석은 착각이었죠.

경아는 세영이에게 물린 어깨가 아픈지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아직도 해가 뜨려면 몇 시간은 있어야 될 것 같았어요. 우선 경아 어깨 상처에서 나오는 피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 누더기가 된 내 옷을 찢어 묶었어요. 자세히 보니 상처가 심해 보였어요. 다리와 팔만 괜찮으면 내가 업고서라도 여기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우선 경아를 앉히고 방법을 생각해 보았어요. 아까 가져온 구급가방을 생각해봤지만, 격투를 하느라고 약병들은 다 깨지고, 붕대는 땅에 떨어져 흙이 묻어 지저분해졌어요. 쓸 수 없을 지경이었죠.

경아는 아프다고 하면서, 걸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때 어떻게 업고서라도 거기서 빠져나와야 하는 건데. 경아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긴장이 풀리니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는 거였어요. 몇 마디 못하고 이내 정신을 잃고 내게 쓰러졌어요. 걱정이 되었어요. 원래도 몸이 약한 애였는데, 그런 심한 일과 상처를 입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어떡하든 도움을 청하던지, 경아를 치료해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어요. 내 상처도 심하게 아파왔어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경아가 꿈틀하고 움직이는 것이었어요. 놀라서 경아를 보니,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것 같은데 움찔거리고 움직이는 것이었어요. 처음에는 상처 때문에 아파 경련을 일으키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어요. 경아의 꿈틀거림은 계속되고, 점점 심해졌어요. 나는 경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아 겁이나 흔들어 깨우려했어요. 하지만 경아의 눈은 떠질 줄 몰랐어요. 대신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 신음소리는 경아의 목소리가 아닌, 굵직한 짐승의 소리 같았어요. 소름이 끼치기 시작했어요. 경아는 이제 심하게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어요. 걱정도 되었으나, 겁도 나기 시작했어요. 경아는 평소의 경아 같지 않았어요. 도저히 한 팔로는 경아의 심한 움직임을 안정시킬 수 없었어요. 목이 터져라 경아 이름을 불러대었으나, 아무런 반응은 없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움직임을 딱 멈추었어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나는 경아의 숨이 멈춘 것 같아 걱정되었어요. 그래서 몸을 기울여 경아의 가슴에 귀를 대보았어요. 깜짝 놀랐어요. 박동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는 것이었어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어요. 경아가 여기서 이렇게 숨을 멈추다니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다시 한 번 제대로 들어보려고 하는데, 박동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어요. 충격이 컸지만 믿기지는 않았어요. 다시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데, 갑자기 꼼짝도 안하던 경아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는 것이었어요. 갑작스런 움직임에 나는 나동그라졌어요.

나가떨어지는 순간, 나는 다행스럽다는 생각부터 들었어요. 하지만, 몸을 일으켜 경아를 보는 순간, 그 다행스럽다는 생각은 공포로 바뀌었어요. 경아의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어요. 눈과 입은 위로 쫙 찢어졌고, 눈은 핏빛으로 빛났어요. 짐승처럼 포효하는 그 모습을 보니, 경아라는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어요. 아까 진수나 세영이가 변했던 그 괴물 그대로였어요.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그 괴물은 이미 몸을 일으켰어요. 나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 뒷걸음질만 쳤어요. 그 괴물은 나를 보고 괴성을 한번 지르더니 한 번에 뛰어 내 앞에 섰어요. 그때 이미 내 머릿속엔 그것이 경아라는 것이 깨끗이 지워졌어요. 단지 나를 물어뜯어 죽이려는 괴물이고, 내가 살기위해서는 처치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남지 않았어요.

입을 벌리자 무시무시한 이빨이 보였어요. 무시무시한 얼굴에 머리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등골이 오싹했어요. 본능적으로 손으로 주위를 더듬다가, 뭔가가 집히는 것이 느껴졌어요. 아까 가져온 석궁이었어요. 그것을 집어 들고, 나를 향해 덮치는 그 괴물의 얼굴을 휘갈겼어요.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는데, 정통으로 맞았는지 그 괴물은 옆으로 넘어졌어요. 나는 그 틈을 타 활을 찾아 석궁에 장전하려했어요. 하지만 왼손을 못 쓴 상태에서 한 손으로 활을 끼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한 손으로 활을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데, 그 괴물은 아까보다 더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어요. 그 끔찍한 모습을 보고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입을 이용해 활을 석궁에 꼈어요. 다음 순간 덮치는 그 괴물의 얼굴을 향해 석궁을 쐈어요.

멋도 모르고 처음 쏴 본 것인데, 가까운 거리인지 정통으로 얼굴을 꿰뚫었어요. 그 괴물은 고통스러운지 하늘을 향해 비명을 질렀어요. 나는 다시 다음 활을 장전하고, 괴로워하는 괴물을 향해 쐈어요. 이번에는 몸통 부분에 박혔어요. 나는 이유 모를 쾌감을 느껴가고 있었어요. 다시 한 번 괴성을 질러대더군요. 나는 다음 활을 꼈어요. 괴물은 무시무시하게 자기 얼굴과 몸통에 박힌 활을 뽑아냈어요. 피가 튀기고 끔찍했어요. 너무 무시무시하더군요. 그러곤 나를 향해 덮쳐왔어요. 나는 너무 놀라 엉겁결에 석궁을 놓쳤어요.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나를 덮치는 그 괴물의 끔직한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옆으로 굴렸어요. 아슬아슬한 차이로 내 몸을 비껴가는 것이 느껴졌어요.

옆을 막 더듬어보니, 과도가 잡히더군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나를 향해 덮치는 그 괴물의 목에 칼을 쑤셔 박았어요. 순간적으로 피가 팍 튀면서, 눈앞이 핏빛으로 가려졌어요. 있는 힘을 다해 내 몸을 타고 있는 그 괴물을 밀쳐냈어요. 그 괴물은 내게 찔린 칼이 치명적이었는지, 그륵그륵 신음소리를 내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어요. 나는 얼굴에 묻은 피를 손으로 대충 훔치고 그 괴물을 바라보았어요. 내가 찌른 칼은 그 괴물 목의 동맥을 찔렀는지 아직도 피가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그러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어요. 죽은 것 같았어요.

나는 아직도 두근거리는 숨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축 늘어진 그 괴물을 끌고 아직도 타고 있는 차로 다가갔어요. 힘들고 지쳤지만, 이 괴물을 태워버리지 않고는 다시 살아날까봐 겁이 났어요. 간신히 그 괴물을 끌고 가는데... 그 괴물, 아니 사실은 경아였죠. 제기랄! 경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어요.

“재혁 씨. 괜찮... 지. 그리고... 날... 죽여... 줘. 태워.. 서라도... 제발...”

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경아 쪽을 돌아볼 수도 없었어요. 내가 그렇게 처참하고 잔인하게 찌르고 죽인 괴물이 사실은 경아였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죠. 미칠 것 같았어요.

나는 그때 인간이 자기 생명을 위해 얼마나 잔인하고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내가 그렇게 사랑한다고 한 경아를 죽이다니. 너무 괴로웠어요. 하지만 그때도 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사실 그때 내 정신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고 자위하기도 하죠.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잔인한 행동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거지요. 그땐 그렇게 생각했어요. 괴물이 나를 혼란시키려고 경아의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나는 혼란으로 괴로워하며 안 돼, 라고 소릴 질렀어요. 그때 나는 한 가지 방법을 택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실행하려고 했어요. 바로 그것이 경아가 아닌 괴물이므로 태워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불타는 차를 향해 옮겼어요. 경아, 그 괴물은 계속해서 얘기했어요.

“재혁... 씨... 나... 아파...”

미칠 지경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괴물을 끌고 갔어요. 불타는 차 바로 앞에 서자, 불길의 뜨거움이 느껴졌어요. 나는 눈을 감았어요. 내가 죽이고 불태우려는 것이 괴물이 아닌 경아일까 겁났어요. 똑바로 볼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괴물을 불에 집어넣었어요. 환청인지 뭔가가 들렸어요.

“재혁 씨... 안... 녕...”

나는 눈을 감은채로 뒷걸음질 쳤어요. 눈을 떴어요. 눈앞에는 경아가 타고 있었어요. 괴물이 아닌... 하지만 구할 생각은 안 났어요. 엄두가 나지 않았겠죠. 눈물은 하염없이 내 볼을 흘러내렸어요. 나는 절친한 친구들과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죽인 것이에요. 그것도 태워서... 제기랄!

나는 무너지듯이 주저앉았어요.

그때 문득 무언가가 숲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어요.

비웃으면서!

그제서야 나는 모든 것이 느껴졌었어요. 어쩌면 정말 괴물은 된 사람은 진수, 세영, 경아가 아니라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누구를 죽인다는 것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쾌감까지 느끼면서 자행하다니. 불에 타고 있는 차와 경아를 바라보면서, 나는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괴로움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어요. 그리곤 세상이 깜깜해졌죠. 정신을 잃은 것이죠.

제가 정신을 차린 것은 두런두런 주변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을 때였어요. 눈을 뜨니 주위는 환해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보였어요. 나는 악몽을 꾼 것이길 바랬어요. 하지만. 앰뷸런스며 경찰차들과 검게 그을린 내 차를 보니, 꿈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어요. 다시충격을 받고 다시 정신을 잃었죠.

다음번에 깼을 땐, 병원이었어요.

거의 일주일 동안 혼수상태였더군요. 모든 일은 이미 황당하게 마무리 지어졌죠. 그 끔찍했던 일은 교통사고로 처리되었죠. 제 증언도 없이 교통사고에 이은 화재로 마무리되었다더군요. 물론 거기에는 이 사건을 조용히 덮으려는 정부 고위층에 계시는 아버지의 개입이 있었겠죠. 그 날 얼마나 호된 경험이었는지 하룻밤 사이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나이보다 늙게 보이는 것이죠.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그 일을 당했던 길은 원래 폐쇄된 길이었데요. 군대가 나서서 하던 국도 건설 중 이상하게 많은 군인들이 사고로 죽거나 다쳐서 공사를 중단하고 다른 쪽으로 현재 길을 냈데요. 우리가 들어갔던 길은 폐쇄된 길이었고. 그래서 밤새도록 차 한대도 안 지나간 것이죠.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히 길을 막아놨는데, 우리 차와 그 벤이 어떻게 들어갔는지 이상하다고 경찰에서도 그랬데요.

어쨌든 나는 그 일로 미친 사람 취급당했죠. 그날 있었던 일을 아무리 설명해 봐도 믿어주지 않고 미친놈으로 보더군요. 자기들 나름대로 내가 교통사고로 친구와 애인을 잃어 감당 못할 충격을 받아 정신이 돌아버린 것으로 본 것이죠. 그래서 6개월간 정신병원에 갇혀있었죠. 의사며 간호원이든 아무도 나를 안 믿어주더군요. 실제로 미쳐가는 줄 알았어요. 그 끔찍했던 밤과 나의 잔인했던 행동, 그리고 경아의 죽음. 어쩌면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일이었죠. 그런데 병원에서 내 얘기를 믿어주는 사람을 하나 만났어요. 그 사람도 환자였죠. 가족을 교통사고로 잃고 미쳐서 병원에 들어온 환자였죠.

“나도 그 숲 가본 적이 있죠. 집사람, 딸애와 아들놈도 거기서 죽었죠. 교통사고가 아니었죠. 내가 죽인 것이죠. 당신도 그렇게 했겠죠. 그 숲에서 살아나와 여기에 있는 것을 보니. 거기에는 옛날부터 악령이 살고 있데요. 그래서 많은 희생자가 나오죠. 특히 안개가 짙게 깔린 여름밤에는 흐흐흐... 당신도 사람들을 죽일 때 쾌감을 느꼈을 거야. 더 죽이고 싶어. 당신도 그렇지?”

그 사람은 정말 돌아버린 것 같았어요. 아니면 악귀가 씌었는지. 결국 그 사람은 내가 퇴원하기 전에 동료 환자 둘을 죽이고 자살했어요. 퇴원한 후로 이 날 이때까지 내가 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에 대한 공부였죠. 오늘처럼 그런 영화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하지만 연구만으로는 아무런 소득이 없었어요. 분명히 그 숲에는 뭔가가 있어 사람들의 피를 부르는 것이 확실해요. 기록을 조사해보니, 그 길이 폐쇄된 지 15년 동안 120명이 교통사고로 죽었어요. 거기서. 모든 사고는 7월과9월 사이에 일어났고, 기상기록에 의하면 그 부근에 안개가 꼈던 밤이었죠.

뭔가가 있죠. 나는 그것을 밝혀 내야해요. 그렇지 않고는 눈을 감을 수 없어요. 요즘도 눈만 감으면, 악몽 같던 그날 밤이 생각나요. 경아의 목소리와 진수와 세영이의 무시무시한 모습과 내게 죽어가던 그 모습들이... 정말 미치겠어요! 아니, 죄송합니다. 휴...

그 사람은 이렇게 믿기 힘든 긴 얘기를 끝냈다. 나는 그 사람의 얘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 얘기를 듣고 나니, 그 사람이 무서워졌다.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사람을 죽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의 그런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제 믿기지 않은 얘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믿으시겠죠. 하지만 전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결심했어요. 그날 그 숲에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무엇이 있었는지 알아내기로. 그리고 그것을 없애버릴 거예요. 원수를 갚아야죠. 모두의 원수를. 그리고 내 원수도.”

그리곤 술값을 내고 비틀거리며, 사라졌다. 나는 찝찝함을 느끼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믿을 수도 없는 얘기였지만, 그 사람의 진지함과 그 무언가가 정말 있었던 일같이 느껴졌다. 며칠간 그 사람 생각 때문에 찜찜한 기분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이었다. 곧 그 사람의 모든 일은 잊혀졌다.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사람의 일이 다시 내게 떠오른 것은 영화제도 끝나고 다가온 여름이었다. 우연히 신문기사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본 것이다.

“산불 방화 해프닝”

어젯밤 강원도 ‘’군 ’번 국도 주변 산에서 방화사건이 발생했다. 범인 이재혁(30살 무직) 씨는 현장에서 검거되었고, 다행히 산불은 번지지 못해 10여 미터 정도 태우고 저절로 꺼졌다. 이 씨는 기름을 준비하고 밤 시간을 택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였다. 이씨는 2년 전 그곳에서 교통사고로 친구와 약혼녀를 잃어, 6개월간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력이 있다. 주변사람에 따르면 이 씨는 그 근방에 악귀가 있어 교통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한편 이 씨는 어제 방화를 저지른다고 자기 몸에도 불이 붙는 사고가 발생해, 현재 병원에서 치료중이나 혼수상태이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그 사람의 광기어리고 슬픈 눈빛이 떠올랐다. 불쌍한 사람... 그 사람의 처절한 사투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름까지 준비했는데 산불이 저절로 꺼지는 것 하며 자기가 불에 탔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정말 뭔가가 그 숲에 있나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작스런 전화벨 소리가 깜짝 놀라게 했다. 과 후배 용일이의 전화였다. 나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한이형! 지금 빨리 병원 영안실로 와요. 최 교수님이 가족과 함께 설악산으로 피서 겸 세미나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차가 뒤집히고 불까지 나서 네 가족 다 돌아가셨대요. 최 교수님만 빼고. 그런데 최 교수님이 사고가 난 후, 발견 당시 얼이 빠져 있었데요. 심하게 상처도 입고. 소름끼치는 얘기지만, 들리는 얘기로는 교수님이 한 손에 피 묻은 칼을 들고 있었데요. 그래서 교수님은 정신도 온전치 않은데도 지금 경찰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 교수님 가족 상가는 우리라도 지켜야 하잖아요. 되도록 빨리 오세요. 자세한 얘기는 영안실에서 하죠. 참, 세상에 별일이 다 있죠. 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