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올라왔던 글을 보다가 이제서야 글이 짤렷다는걸 알았기에..ㅠ_ㅠ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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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건 엄청길어요.

화내시지 마시고 끝가지 읽어보세요

길다고...

아참 감사내공도 흐흐

정말 무섭습니다.

제목은 죽음의 숲

죽음의숲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라구요?

그럼 그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 했던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그것도 영문 모를 사악한 힘 때문이었다면...

그 사람의 절규 중에서

봄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학교에는 아직 고등학생 티를 벗지 못한 신입생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캠퍼스 안에는 학기 초면 언제나 볼 수 있는 풍경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각 서클들이 신입부원들을 모집하기 위해 홍보에 열심이고, 신입생들은 여기저기들 기웃거리고 있고. 우리 서클도 예외는 아니어서, 올해도 역시 신입생들을 뽑기 위해 홍보 책자를 만들었고, 후배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 풍경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나도 이제 정말 늙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쓴 웃음이 나왔다.

올해 회장이 된 영준이가 내게 이번에 만든 책자 좀 봐 달라고 찾아왔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후배들의 작품을 보았다. 겉표지에서 이제까지 우리 서클에서 했던 영화제들의 포스터들을 볼 수 있었다. 그 포스터들을 보니 문득 정말 열심히 일했던 그때의 기억이 뇌리에 스쳤다.

작년에 했던 “공포영화제”의 포스터에 눈이 갔다. 영화제를 하기까지 그 힘들었던 과정이 떠올랐다. 자막 만들랴, 자료집 편집하랴 밤새우던 일, 비디오가 고장 나서 힘들던 일. 상영해야 될 테이프가 불실돼서 엄청 당황하고 이리저리 뛰어 다니던 일.

그러다가 문득 그 사람의 어두웠던 눈빛이 떠올랐다.

벌써 일 년이 다 되가는 구나.

지금쯤 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 사람의 도저히 믿기지 않던 얘기도 떠올랐다. 그 얘기가 사실이었다면 그렇게 깊은 아픔을 지녔던 그 사람의 마지막을 알고 싶었다. 지금쯤은 살아있을까.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잊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아니면 터무니없는 거짓말하기 좋아하는 상상력 풍부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작년 봄이었다.

영화제 준비에 녹초가 되었던 우리는 행사기간을 맞이해 마지막으로 최선을 다해 행사진행에 정신이 없었다. 밀어닥치는 관객관리에다, 가끔씩 찾아오는 기자들에게도 취재 협조하랴, 수업도 들어가랴 여하튼 새벽부터 상영이 끝나는 저녁 8시까지 정신이 없었다. 나흘 상영예정이었는데, 모두들 첫날이 지나가기도 전에 녹초가 되어버렸다.

아마 사흘째였을 것이다. 그 사람을 만난 것이.

그날 마지막 상영작은 셈 레이미의 데뷔작 “이블 데드”였다.

이미 널리 알려졌고, 시중에 비디오로 출시된 작품이지만, 그래도 저 예산의 B급 공포영화로서 어린 나이에 천재성을 번득인 셈 레이미의 실력을 볼 수 있는 영화라 상영작으로 선정했었다. 사람들이 많이 봤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예상밖의 많은 관객이 몰려와 객석은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람들까지 있을 정도로 꽉 찼다.

영화를 시작하고 십여 분이 지났을 때였다. 우리는 문을 막고 서서 못 들어간 관객들에게 오늘은 들어갈 자리가 없으니, 내일도 상영이 있으니, 내일 오시라며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래도 선배랍시고 한 걸음 물러서서 후배들에게 내일 상영 준비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상영장소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사람은 입장을 못하게 하는 후배에게 제발 들여보내달라고 사정하는 것이었다. 나이도 이런 영화제에 오기에는 많아보였고 너무 필사적인 부탁이었기에, 나는 공포영화광으로 생각하고 서서 봐도 괜찮으면 보라고 했다. 그 사람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마치 허기진 사람이 음식을 찾듯이 허겁지겁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곧 각자 맡은 자리로 들어가 뒷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극장 안에는 “이블 데드”의 트레이드마크인 음산한 장면과 영상이 어두운 화면에 나타나자 많은 관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영화가 끝나자, 사람들은 찝찝한 표정으로 문을 나섰다.

우리들은 관객들이 나서기가 무섭게 장비를 치우고 내일 상영 준비에 들어갔다. 나는 담배를 빼어 물고 오늘도 갔구나 하고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한 후배가 다가와 누군가 나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또 어떤 영화광이 테이프 좀 복사해 달라는 얘기로 생각하고, 회장이던 인선이에게 가보라고 했다. 짐을 다 싸고 집에 가려는데 인선이가 난처한 표정을 하고 내게 다가와 좀 이상한 사람 같으니 나보고 가보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텅 빈 극장으로 들어갔다. 극장 안에는 스크린 역할을 하던 하얀 천이 덩그러니 앞에 걸려, 듬성듬성 켜있는 어두운 불빛에 음산한 분위기로 빛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던 객석은 이제 텅 비어 있어, 왠지 모를 음산한 분위기를 더욱 진하게 하고 있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어두운 탓에 잘 볼 수가 없었다.

“공포영화를 좋아하십니까?”

갑자기 저 구석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돌아보았다. 아까 늦게 와서 들여보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던 그 사람이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뭐 궁금한 점이 있으시다면, 저희가 자료집도 준비했는데요.”

나는 대답을 하면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자세히 관찰하였다. 대학교 영화제에 오기에는 좀 나이가 들어 보였다. 머리도 희끗희끗한 게 한 마흔 쯤 되어 보였을까. 얼굴에도 주름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외모와는 달리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약간의 광기가 내보여지는 그 사람의 눈빛이었다.

“회장이시라는 분에게 여쭈어 보니깐, 사실 영화제 일은 전부 선배가 기획하고 준비하셨다고 해서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자료집에 안 나올 것 같아서요. 시간이 있으시면 저와 좀 얘기하실 수 있을까요.”

그리곤 그 사람은 대뜸 영화에 얽힌 이상한 얘기를 시작했다.

“공포영화를 주제로 영화제를 주관할 정도면, 이런 영화에 관련된 괴기한 얘기들도 많이 알고 계시겠죠? 예를 들어 “이블 데드”도 편집 판에 따라 화면 속에 악마의 모습이 실제로 보였다는 얘기 같은 것도.”

“그 얘기는 저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얘기입니다. 제일 처음 영화를 찍고 편집할 때, 주인공이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창문 너머로 물끄러미 보이는 괴상한 얼굴이 보였다는 얘기가 있었죠. 감독과 제작자는 처음에는 스텝이 잘못 찍힌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 얼굴의 모습이 도저히 인간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아 의아해 했다더군요. 빨간 눈과 입에 피 칠을 한 듯한 그 모습은 영화 속의 악령이 실제로 나타난 것 같더래요. 너무 이상해서 감독과 제작자들은 그 장면을 삭제한 상태로 상영하기로 했고. 하지만 일부 마니아나 악마 숭배자들 사이에 그 괴상한 장면이 든 편집 판이 나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지만. 혹시 모르죠. 영화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기 위한 고단수의 상술일지도.

그런 경우도 있었잖아요. 미국 판 “세 남자와 아기바구니”에서 소년의 유령과 장총이 배우들 뒤로 보이는 장면이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된 경우도 있었죠. 거기에 대한 얘기도 많은데, 그 장면을 찍은 아파트에서 소년이 장총 오발사고로 죽은 적이 있다는 등, 제작자가 비디오 판매를 위해 삽입한 장면이라는 등, 촬영 소품이 잘못 나온 것을 사람들이 부풀린 것이라는 등. 얼마 전에는 유명 가수의 뮤직 비디오에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이 보였다는 얘기도 있었죠.

아, 그런 일도 있었어요. 80년대 초 스필버그가 제작한 영화 중 “폴터가이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악령이 꼬마 여자애를 저 세상으로 데려가려는 쓸 만한 공포영화인데, 첫 작품이 성공하니까 웬만한 공포영화가 다 그렇듯이 속편들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속편들은 그리 재미없었죠. 그런데 문제는 영화가 아니에요. 영화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원인 모를 이유로 하나씩 죽어가는 것이에요. 배우, 스텝, 더구나 주인공을 맡았던 어린 꼬마애도 사고로 죽게 되었어요. 그리고 미쳐버린 사람도 생기고. 사망 원인도 불가사의 했죠.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빌딩 창문에서의 추락사, 권총 오발 사고, 구명조끼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의 익사, 원인 모를 병. 그 영화에 참여 했던 여러 명이 이런 끔찍한 일을 당했죠. 결국 속편은 아마 3편에서 중단되었을 거예요. 그 후론 어떤 제작자나 감독, 배우도, 하다못해 광고 효과를 노리는 영화사도 이 영화에 손대길 기피하게 되었죠. 그 생각을 하고 이 영화를 보면 으스스 합니다. 여하튼 영화에 관련되어 많은 기괴한 얘기들이 있죠.”

나도 모르게 많은 얘기를 해 주었다. 그 사람은 이런 황당한 얘기를 들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진지한 자세로 듣고 있었다.

“역시 그런 일이 많이 있었군요.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이런 얘기 하면 좀 이상하게 생각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공포영화나 공포소설에 관심이 많거든요. 심령학은 물론이구요.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죠. 여하튼 제가 알고 싶은 것은요. 왜 하필 공포영화제를 개최했고, 거기에 “이블 데드”라는 영화를 선정하셨나 하는 겁니다. 자료집에 나와 있는 영화사적인 얘기나 심리학적인 얘기 말고요. 개인적인 경험이나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가 해서요. 그런 것이 있으면 제발 얘기해 주시겠습니까.”

그 사람은 필사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싶은 듯이 거의 애원조를 부탁을 해왔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알고 싶으신지 잘 이해가 안가는 데요. 하지만 자료집에 쓴 것 이외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공포영화제와 ”이블 데드“를 상영한 것은 아닌데요.”

“잘 생각해보세요. 무슨 얘기나 무슨 특이한 경험 없이 공포영화를 상영할 생각을 했나요?”

그 사람의 이상할 정도로 집요하고 끈질긴 질문에 나도 모르게 생각을 해 보았다. 그 사람이 내 주변에 일어났던 이상한 일에 대해 알고 묻는 것인지 여하튼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대답을 안 하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공포영화제의 아이디어는 후배들이 내놓았고, 나는 영화선정이나 대충 영화제 기획과 충고 정도만 해 주었을 뿐이었다. 내 그런 대답에 실망한 표정을 짓고 내게 마지막이라면 또 괴상한 질문을 했다.

“그럼 영화에 대해선 많이 아시겠군요. 혹시 오늘 상영한 “이블 데드”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바탕으로 했다는 얘기나 자료 본 적 있으십니까?”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데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있을 수 있죠. 왜냐하면 ”이블 데드“라는 영화는 기존에 있던 공포영화들의 요소들을 전부 짬뽕해서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거든요. 음산한 분위기, 밤, 고립된 별장, 탈출이 불가능한 숲속, 좀비, 괴물이 되어가는 동료, 피, 잔인한 살인 등등. 가장 우리가 흔하게 알고 있는 공포영화나 무서운 얘기의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는 영화니까요.”

그는 내 대답을 듣는 동안 무서울 정도로 눈을 번뜩였다. 그것도 일순간 갑자기 너무 슬픈 눈빛을 지었다. 동정심이 느껴질 정도로. 내 대답을 들은 그는 알았다는 듯이 힘없이 일어났다.

“그랬군요. 저는 또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줄 알고. 하긴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인 줄 알지만. 여하튼 고맙습니다. 피곤해 보이는데 시간 내 주셔서.”

너무 힘없이 보이는 그의 축 쳐진 어깨와 뒷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저기요!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이블 데드“나 공포영화에 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지신 것 같은데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사실 그를 불러 세운 건, 동정심보다는 이상할 정도로 공포영화, 특히“이블 데드”라는 영화에 관심을 보이는 그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아선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뭔가 결심한 듯이 내게 말했다.

“고맙군요. 공포영화나 이런 분야에 조예가 깊으시다면 제가 도움을 주실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사실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제 얘기를 믿어줄 사람일지도 모르겠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술 한 잔 사면서... 저의 미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미친놈이라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지만, 오늘같이 힘 드는 날에는 저도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군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학교 앞에 있는 소주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열심히 뒷정리 하고 있던 후배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앉아서 볼 때는 멀쩡해보였는데, 그 사람은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다리가 불편한 그 사람 때문에 가까운 소주방으로 향했다. 소주방에는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술을 주문하고 나서 우리는 서로를 소개했다.

마흔 살 남짓으로 보이던 그 사람은 놀라게도 서른도 안 된 젊은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우리학교 4년 선배였다. 물론 과는 달랐지만. 내가 선배니까 말을 편히 하시라고 했는데도, 그는 끝까지 나에게 말을 높였다. 재혁이라는, 그 선배는 작년만 하더라도 젊은 나이에 그 어렵다는 언론사 시험에 합격해 능력 있는 기자로 촉망받는 인재였다고 했다. 결혼하기로 한 약혼녀도 있었고, 행복한 미래를 앞두고 있었다고 했다.

그 일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기 전에는.

그 선배는 술이 나오자마자 연신 들이키더니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한 씨는 아직도 절 이상하게 생각하겠죠. 하긴 나도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아직도 실감이 나질 않아요. 휴... 우선 제가 왜 그토록 공포영화, 그 중에서도 ”이블 데드“라는 영화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말씀드리죠. 그 영화 속 일이 실제로 제게 일어났다면 믿겠습니까?

미친놈처럼 보이죠? 그래도 할 수 없어요. 그 개 같은 일은 실제로 제게 일어났답니다. 이놈의 다리도 그때 쓸모없이 돼버렸고요. 이거 한 번 보세요.”

그러면서 그는 주머니에서 이제는 거의 누더기가 되어버린 신문기사를 꺼내주었다. 기사 날짜는 일 년 전7월로 되어있었다.

아주 작은 교통사고 기사였다. 기사 내용은 대충 이랬다.

-피서길 교통사고 급증. 피서 길에 교통사고가 급증하고 있다. 어제 밤에도 강원도 산길에서 과속으로 달리던 소나타 승용차가 전복하여 절벽 아래로 굴러 차에 타고 있던 승객 중 운전자 이재혁(29세, C신문기자)을 제외한 동승자 3명이 전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차량은 화재가 일어나 전소되었다. 그 외에도 경부고속도로에서는 5중 추돌 사고가...“

나는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교통사고가 공포영화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그 사람은 나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이야기를 덧붙였다.

“신문 기사라는 것이 다 그렇더군요. 제가 기자였긴 했지만, 사실 믿을 만한 기사는 거의 없어요. 대부분 기자의 주관으로 기사 방향이 정해져 전달되곤 하죠. 자세한 속사정이나 원인은 삭제된 채, 필요한 부분이나 결과만을 전달하니 신문사의 의도대로 사실이 왜곡돼서 전달되는 경우도 많고, 그냥 독자들이 오해를 하고 자기 나름대로 사실과는 다른 해석을 내릴 때도 많고. 사실 부끄럽지만 내 속 깊은 곳에서도 그렇게 교통사고로 처리되길 바랐어요.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죠. 제기랄!”

그는 다시 괴로워지는지 술을 찾더니,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뭔가 아픈 기억을 되씹는 사람처럼 담배연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가만히 있었다. 순간 그의 눈에서 눈물이 약간 보인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나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얼른 고개를 들고 한 숨을 내쉬더니 정말 괴로운 듯이 얘기를 시작했다.

출발은 어느 여행보다 즐거웠어요.

그때 나와 경아 그리고 친한 친구들인 진수와 세영이는 설악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죠. 피서 철이라 차가 막힐 것 같아 우리는 느지막하게 서울을 출발했어요. 모두들 직장을 다니고 있었으니, 일을 다보고 밤 10시쯤 여행에 나선 거죠.

내 차를 가지고 떠났어요. 모두들 빡빡한 일과에서 탈출한다고 들뜬 분위기였고, 저마다 각자 이번 여행에 많은 즐거움을 기대하고 있었어요. 대기업에 다니는 진수는 대리 진급을 했고, 외국 컴퓨터 회사를 다니는 세영이는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엘리트였어요. 나도 정말 간만에 얻은 휴가였고, 바쁜 기자 생활에서 벗어나 친한 친구들과 그리고 결혼을 약속한 경아와의 여행이었으니 즐거울 수밖에 없었죠.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고 해도 서울을 벗어날 때까지는 차가 많더군요. 하지만 곧 국도로 접어들자, 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어요. 우리는 천천히 여유 있게 가기로 하고, 휴게소에서 우동도 사먹으면서 여행길을 떠났어요.

밤은 깊어갔고, 우리는 어느새 경기도를 벗어나고 있었어요. 희미한 별빛에 보이는 주변 산세는 점점 험해졌어요. 우리는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피곤함을 잊고 떠들었어요. 오랜만에 만났고 각자 서로 다른 직장을 다니기 때문에, 직장 얘기만으로도 할 얘기가 많았어요. 세영이가 자기 회사의 최신 시스템에 대해 한참 말하다가, 갑자기 으스스한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어요.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 회사는 컴퓨터에 관해선 세계 최고라고 주장하잖아. 그래서인지 회사 내에서 접속할 수 있는 전산망이 7,8개가 넘어. 더군다나 그 많은 전산망에 접속할 수 있는 아이디 같은 것을 쓸 수 있지만, 비밀번호는 다른 것을 쓰게 하거든. 우리 회사는 보안에 거의 목숨 건 회사이거든. 또 그 많은 비밀번호를 6개월에 한 번씩 바꿔야 해. 그러니 비밀번호 관리가 장난이 아니야. 잊어버리거나 수첩에 적어두지 않으면 엄청 고생해야해. 만약 틀린 비밀번호를 3번 입력하면 사용자의 아이디는 취소되거든. 잊어버렸다고 메인 시스템 관리자에게 비밀번호를 물어도 소용없어. 요즘은 비밀번호는 입력한 사람만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도록 코드화 돼있거든.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은 그 잊어버린 비밀번호와 해당 아이디를 취소하고 다시 발급받는 수밖에 없어. 그러니 우리 회사에서 그 만큼 번거롭고 중요한 일이 비밀번호 관리야. 그런데 그 비밀번호에 얽힌 무서운 얘기가 회사에 떠돌고 있어.

벌써 한 4년 된 얘기구나. 내가 신입사원 연수 대 들은 이야기거든. 그런데 그 일이 얼마 전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엄청 충격을 받았지. 내가 입사하기 전에 어떤 과장이 있었데. 그 사람은 일은 잘 하는데, 매번 비밀번호를 잊어버려 고생했데. 한두 번은 모를까 매번 그런 일이 발생하니까, 전산실은 물론 상급자도 비밀번호에 관해선 그 과장을 비난했데. 칠칠치 못하게 비밀번호도 매일 잊어먹고 다닌다며. 그 과장도 처음에는 그런 비난을 웃음으로 넘겼지만, 모든 회사 사람들이 비웃기 시작하고, 그런 사람으로 찍히자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어. 어쩌면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도 모르지.

여하튼 능력 있던 그 과장은 그런 이미지 때문인지, 회사에서도 무시 받고, 사람들도 인정을 하지 않기 시작했데. 실제로도 업무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항상 불안한 사람으로 보였데. 고민하다 못한 그 사람은 자기 책상 주위에 포스트잇으로 패스워드를 메모해서 붙여놨지만, 회사 보안 검열에 걸려 시말서도 쓰고 엄청 깨졌대. 그까짓 거 수첩에 적어두면 될 것 같지만, 그 과장은 수첩도 자주 잊어버려 말짱 헛일이었데.

왜 그런 사람 있잖아? 전화번호나 숫자는 잘 까먹는 사람. 나도 그런 사람이긴 하지만, 그 과장은 좀 심했나봐. 여하튼 비밀번호 때문에 바보 취급받은 그 과장은 언젠가부터 비밀번호를 하나도 잊어먹지 않고 잘 쓰기 시작했데.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과장이 이제 정신 차렸구나, 했데.

몇 개월을 잘 사용했데. 일도 제대로 하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과장은 야위어가고, 건강이 상해가는 것처럼 보였데. 점점 신경질적으로 되고, 눈에는 이상한 광채가 번뜩이는 것 같았데. 그러다 비밀번호 변경 기간이 왔어. 그 과장도 물론 비밀번호를 바꾸었지. 비밀번호 변경하는 마지막 날이었데. 그날 마지막으로 퇴근하는 사람이 본 그 과장의 모습은 당황한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상하다 이상해. 분명히 맞는데...’ 라고 중얼거리며 남아있었다는 거야. 그것이 그 과장의 마지막 모습이었어.

다음날 아침. 그 과장은 회사에서 끔찍한 시체로 발견되었어. 모니터에머리가 박혀서 죽어있는 것이었어. 마치 머리 대신 모니터가 달려있는 피투성이 괴물처럼 보였데. 회사에선 난리가 났고, 경찰이 와서 수사에 나섰지만, 그날 밤에 그 사무실에 들어온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감시 카메라를 통해 밝혀졌어. 경찰은 미궁에 빠진 이 사건을 사고사로 마무리 지었어. 책상 밑에 무언가를 줍다가, 머리 위로 모니터가 떨어져생긴 사고로. 회사도 그렇게 받아들였지. 하지만 이상한 얘기가 많이 돌았데. 과장의 시체가 발견된 장소는 책상과 1미터 이상 떨어진 곳으로 모니터가 날아와서 과장의 머리에 내려쳐진 격이라는 등.

그런데 그 죽은 고장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충격적인 일이 발견되었어. 그 과장의 수첩에는 이제까지의 바뀐 날짜별로 비밀번호들이 깨알같이 적혀있었데. 그런데 문제는 그 비밀번호들이 무시무시했데.

mOnster, Devil, EVil, DeAtH등. 마지막에 적혀있던 번호는 ‘KILL ME’였다는 거야.

너무 이상하지 않니? 자기를 죽여 달라는 것을 비밀번호로 쓰다니. 그 이후에 이상한 소문들이 떠돌았어. 흔한 귀신 얘기들 같은 것. 청소부 아줌마가 피투성이의 그 과장 유령을 봤다는 등, 밤늦게 그 과장이 죽은 자리의 모니터에 비밀번호로 접속하다 실패하면, 모니터에 그 과장의 원망스런 얼굴이 보인다는 등. 그 중에 가장 압권인 소문이 'Killed Me'란 다른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죽게 된다는 얘기였어. 신입사원 연수 때 비밀번호를 잊어먹지 말라며 농담조로 이 얘기를 들려주곤 했지. 그런데 정말 이상한 얘기는 여기서부터야. 올해 입사한 신입사원이 우리 옆 부서로 왔어. 바로 그 과장이 죽었다는 사무실로. 그 신입사원은 나도 몇 번 점심같이 먹은 적이 있는데, 착실하고 적극적인 청년이었어. 호기심이 많은지 이것저것 묻는 것이 많긴 많았지.

며칠 전 아침이었어.

신입사원답지 않게 늦게까지 혼자 일하곤 하던 그 친구가 아침에 사무실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었어. 바로 그 과장이 쓰던 책상 앞에서 심장마비로. 나도 직접 그 시체를 보았는데, 외상이 하나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끔찍했어. 공포로 가득 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상태로 죽어있었어, 마치 뭔가 무서운 것이나 끔찍한 것을 목격한 것처럼. 그런데 그 신입 사원 시체 옆에는 모니터가 켜져 있었고 Killed Me라는 것이 메모장에 적혀있었어. 바로 그 신입사원이 그 비밀번호를 입력시키고 있었던 거야. ‘Killed Me’라는.

오싹하지? 젊은 사람이 갑자기 심장마비라니. 그렇게 겁먹은 표정을 짓고 죽고. 더구나 그 소문의 비밀번호를 입력시키다가... 회사는 요즘 그 죽음의 비밀번호에 대한 얘기가 너무 많이 들려, 아예 중앙 시스템에 ‘Kill_me’라는 비밀번호가 입력이 안 되게 해버렸어. 그리고 여러 개가 되는 비밀번호도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데.

웃기지? 첨단의 컴퓨터 회사에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나고, 그것 때문에 회사 방침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

세영이의 섬뜩한 얘기로 차안의 분위기도 그런 얘기가 화제가 되었어요. 겁이 많은 경아는 그런 얘기 그만 하자고 했지만, 진수나 나는 경아가 겁을 내면 낼수록 무서운 얘기에 열을 올렸어요. 경아는 도저히 안 되겠는지 화제를 세영이의 여자 친구인 경희 씨 얘기로 돌렸어요.

“세영 씨, 경희 씨는 왜 이번 여행에 못 왔어요?”

“글쎄요. 나도 꼭 같이 오려고 했는데, 회사일이 너무 바쁜가 봐요. 덕분에 재혁이와 경아 씨 행복한 것 구경만 하게 되었네요,뭐.”

“경희 씨 회사는 참 바쁜가 봐요. 그러고 보면 우리 회사가 훨씬 여유 있는 것 같기도 하네.”

경희 씨라. 아직도 세영이를 못 잊어 하는 것 같던데. 경희 씨를 볼 때마다 나는 심한 가책을 받아요. 나 때문에. 제기랄! 다 지난 얘기지만, 경희 씨마저 그 여행에 왔더라면 비극은 더 커질 뻔했죠. 이런 걸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는지. 여하튼 우리는 경아의 투정 때문에 더 이상 무서운 얘기를 못하게 되었어요.

어느새 주위에 불빛은 거의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차도 가끔에 한 대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더군다나 이상한 밤안개가 끼기 시작했어요. 삽시간에 안개는 짙어져 불과 십여 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어요.

나는 운전을 조심스럽게 했죠.

차 밖의 분위기는 괴기하고 음산해지기 시작하자, 농담하기 좋아하는 진수는 이때다라며 다시 무서운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경아 씨, 이 길에 얽힌 무서운 얘기 알아요? 옛날부터 강원도에서 서울로 올라오려면 이 길을 지나야 했데요. 그런데 오늘같이 밤안개가 낀 날이면 항상 지나가는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거예요. 그것도 잔인하게. 심장이 없어졌다는 등 머리가 뽑혔다는 등.

여기까지는 전설에 고향 같죠. 그런데 그 얘기는 요새까지 계속돼요. 늦은 밤에 이 길을 오가는 트럭 운전사들 사이에 전해지는 얘기인데, 이 길을 공사한 것은 군대 공병대였데요. 그런데 산세가 너무 험해 난공사였고, 길을 만들다가 많은 군인이 죽었데요. 그래서 한 맺힌 군인들의 귀신들이 여기에 서려, 여름만 되면 원인모를 교통사고가 많이 발생한데요. 그래서 이 근처 마을 사람들은 절대로 밤에 이 길을 지나가지 않는데요. 무섭죠? 경아 씨.”

“진수 씨, 너무해요. 그런데 정말이에요?”

“그럼요.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것 봤어요. 우리 회사 강원도 지사장님이 해준 얘긴걸요. 그 분이 이 근처 출신이거든요.”

진수는 정말인 것처럼 얘기했지만, 워낙 장난기 있는 친구라 나와 세영이는 또 장난친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흘려들었어요. 그때는 몰랐죠. 제기랄.

우리들은 무서워하는 경아를 놀리고 있었죠. 안개는 더욱 짙어져서 차 창문에 습기가 꼈고, 앞을 보기 위해선 와이퍼를 켜야 될 정도였죠. 주위에는 여름이라 무성한 나무들이 음산하게 보였어요. 주위는 기분 나쁠 정도의 고요가 흘렀고, 드문드문 지나가던 차들도 아예 안 보이기 시작했어요. 뭔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어요.

그때였어요.

갑자기 ‘꽈꽝!’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기우뚱하더니 덜덜덜 거리며 길을 벗어나 길 옆 숲에 처박혔어요. 우리는 돌연한 충격에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죠.

나는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친구들을 돌아보았어요. 모두들 괜찮다 했고, 다행히 가벼운 타박상 몇 군데 입은 것 같고, 심한 상처는 없어 보였어요. 경아는 좀 놀라고 왼팔에 작은 멍이 들은 것으로 그쳤어요. 차는 뒷바퀴는 도로에 걸치고 앞바퀴는 1미터 정도 아래 길 밖으로 처박힌 상태였어요. 기울어진 차에서 간신히 내리는데, 갑자기 세영이가 아악하면서 신음소리를 내었어요.

세영이를 보니 고통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있었어요. 자세히 살펴보니, 세영이의 발목이 퉁퉁 부어있었어요. 사고 날 때 발목을 좀 다친 것 같았어요. 뼈에 이상이 있는지 그쪽 발로는 걷지를 못하겠다고 했어요. 우리들은 앞으로 기운 차에서 세영이를 부축해 간신히 문을 열고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자욱한 물안개에 인적이란 전혀 없는 깊은 산속 같았어요. 설악산으로 가는 국도에 이런 길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한적한 곳이었어요. 우선 차의 상태를 살펴보았어요. 차는 말이 아니었어요. 바퀴는 앞, 뒤 하나씩 펑크가 나있었고, 바퀴 축은 충격에 심하게 휘어있고 여기저기 찌그러져 마치 큰 교통사고라도 난 듯 했어요.

나는 짐으로 꽉 차있는 트렁크에서 간신히 비상 플래시를 하나 찾았어요. 다행히 배터리도 이상 없고, 헤드라이트도 괜찮은지 불은 들어왔어요. 그때가 아마 밤 1시를 좀 넘었을 때였어요. 내 휴대폰과 세영이 휴대폰은 무용지물이었어요. 바로 전까지만 해도 통화가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자욱한 밤안개가 방해가 되는지 어느 전화번호도 불통이었어요. 우리들은 주위를 살펴보았죠. 그때의 섬뜩함이란.

여름이라 무성해야 할 나무들이 이상하게도 가지만 남고 죽어있어요. 짙은 물안개는 그 음산한 분위기를 더했고, 주위에 불빛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숲속으로 들어갔다는 길을 잊어버릴 것 같고,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무들은 그렇게 죽어있는데, 발에 밟히는 흙은 푹신하고 기름져 보였어요. 뭔가 양분을 듬뿍 빨아들인 것 같은. 우리는 갑자기 차가 왜 그렇게 되었나 알아보려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오던 길을 좀 올라가 보았어요.

길에는 사람 몸통만한 구덩이가 두 개 있었어요. 포장도로에 그런 구덩이가 아무런 표시 없이 두 개나 나란히 위험하게 방치되어 있는 것에 대해, 도로 공사에 대해 화가 치밀었으나, 이상한 생각도 들었어요. 구덩이 안은 이상할 정도로 날카롭고 뾰족한 돌이 많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어요. 이런 구덩이이라면 아무리 튼튼한 바퀴를 가진 트럭이나 지프차도 사고 나기 십상으로 보였어요. 더구나 이런 구덩이가 길 가운데도 아니고, 바로 바퀴가 지나가는 부분에 있었다는 것도 이상했어요. 마치 지나가는 자동차를 멈추게 하려는 덫을 친 것 같아 보였어요. 사냥꾼이 사냥감을 노리고 친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어요. 무언가가 저 어둠너머에서 우리를 먹이로 생각하고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고, 대책을 생각해 보았어요. 우선 처박혀 있는 차의 라이트와 비상 등을 켜놓고, 주위를 밝게 했어요. 하지만 차의 헤드라이트는 주변의 우거진 나무에 가려 생각보다 주위를 밝게 하지는 못했어요. 어쨌든 처음에는 지나가는 차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이었는데, 30분이 지나도록 한 대도 지나지 않는 거예요. 기다리다 지친 우리는 길가에 주저앉아 휴게소에서 사온 먹을 것을 펴놓고 먹으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어요.

그런데 발목을 다친 세영이가 점점 고통이 심해지는지 괴로워했어요. 웬만해선 자기 힘들거나 아픈 것 불평하는 친구가 아닌데, 그때는 정말 고통스러운지 괴로워하는 것이 티가 났어요. 이상하게도 발목만 상했는데, 갑자기 세영이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열이 올랐어요.

경아는 걱정되는지, 나보고 어떻게 좀 해보라고 했지만, 지나가는 차를 기다리는 수밖엔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단지 가지고 온 양주와 맥주를 꺼내 술을 마셔서 아픔을 잊으라며 독한 술을 권할 뿐이었어요. 세영이는 자기를 걱정하는 우리에게 미안한지 주위를 딴 데로 끌기 위해서인지, 술을 한잔 진수에게 권하며 말했어요.

“야, 진수야, 나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그냥 기다리기도 지루하니 좀 재미있는 얘기 좀 해봐라. 아니면 분위기에 어울리게 좀 무서운 이야기라도.”

그 얘기를 들은 진수는 자기 특기인 재미있는 농담을 하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분위기가 이러니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고 술만 들이키게 되었어요. 지나가는 차는 나타날 생각도 않고, 우리는 점점 차에 대해서 포기하고 있었어요. 밤안개는 더욱 짙어졌고, 주위의 숲은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어요. 숲 너머 어둠속에서 무언가가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으스스한 기분도 들었어요. 분위기가 계속 처지자, 진수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이야기를 중단하고 술만 마셨어요.

시간은 정말 지긋지긋하게 안 갔고, 지나가는 차는 이상할 정도로 나타나지 않았어요. 한동안 고통을 참고 있던 세영이가 아픔이 더욱 심해졌는지, 신음소리를 내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목이 타는지 물을 찾았어요. 그때 물은 다 떨어지고, 양주 반 병 정도 밖에 안 남았어요. 세영이는 술이 아닌 물을 찾았고, 우리에겐 남아있는 물이 하나도 없었어요. 세영이의 상태가 좀 심각해지고, 몸의 열은 더욱 뜨거워졌어요.

보다 못한 진수는 물을 구해보겠다며, 세영이와 우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하나 밖에 없는 손전등과 빈병을 들고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갔어요. 경아는 왠지 모르게 걱정되는 표정을 지었고, 진수의 뒷모습을 보니 나도 까닭모를 불안함이 느껴졌어요. 순식간에 진수가 든 손전등의 불빛은 무성한 숲 사이로 사라졌어요. 마치 숲이 진수를 삼켜버린 것처럼 보여 졌어요. 생각이 그렇게 드니 갑자기 온 몸에 소름 쫙 끼쳤어요. 애써 불길한 생각을 떨쳐버리고, 불안해하는 경아를 안심시켰어요.

“뭘 그렇게 걱정하니? 진수는 언뜻 보기에 덜렁대고, 실없는 애 같지만, 알고 보면 담력도 세고 속 깊은 애야.”

나는 얘기를 하고 나서, 내가 한 말에 이상함을 느꼈어요. 단지 물을 뜨러 간 것뿐인데 이런 걱정까지 하다니. 세영이도 상태도 좀 더 심해졌어요. 의식이 오락가락 할 정도였으니까요. 이것도 너무 이상했어요. 사고 났을 때만해도 발목만 아파하고 정신도 멀쩡하고 몸의 열도 없었는데, 갑자기 세영이의 몸이 이상할 정도로 나빠진 것이.

진수가 숲으로 물을 구하러 들어간 후, 죽음과 같은 적막이 흘렀어요. 우리도 가만히 숲만 바라보고 있었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요. 간간히 세영이의 신음소리만 그 적막을 깼어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숲으로 들어간 진수는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점차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저 멀리서 사람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고, 경아는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저에게 안겼어요. 나도 너무 겁이 나, 덜덜 떨면서 과일 등을 깎아 놓으려고 내 논 과도를 집어 들었어요. 그 끔찍한 소리에 세영이도 정신이 들었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어떻게 된 것이냐고 계속 물어봤어요.

나는 진수에게 무슨 일이 난 것 같아 걱정이 들었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어요. 경아는 내 옆에 바싹 붙어서 떨고 있었어요. 공포심은 전이되는 것인지 경아가 옆에서 무서워하자 나도 무서워졌어요. 그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린 후, 또 주위는 적막에 쌓였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실제로는 한 5분도 안 될 시간이었으나, 그 당시 우리에게는 죽음과 같이 긴 시간으로 느껴졌어요. 그 적막을 숲속으로부터의 이상한 소리가 깨버렸어요. 처음에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어떤 소리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어요. 하지만 그 소리는 점점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어요. 경아는 무서운지 소리가 점점 가까운 곳에서 들리자 덜덜 떨었고, 나도 두려움과 함께 소리는 나는 쪽을 응시했어요. 세영이도 겁이 나는지, 불편한 몸을 움직여 숲 쪽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려고 발버둥 쳤어요. 점점 또렷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격렬하게 숲을 헤치고 뭔가가 우리에게 달려오는 것 같은 소리였어요. 나도 모르게 과도를 움켜진 손에 힘이 들어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두려움에 떨며 그 소리가 나는 깜깜한 숲속을 뚫어지게 쳐다보았어요.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오고, 숲을 헤쳐 오는 소리와 함께 헉헉거리는 기분 나쁜 신음소리마저 들려왔어요.

그 순간, 숲에서 뭔가 시꺼먼 물체가 퍽하며 튀어나왔어요. 경아는 비명을 질렀고, 나는 본능적으로 그 튀어나온 물체를 항해 칼을 겨누었어요. 무서운 기세로 숲에서 튀어나온 그 물체는 우리 앞 3,4미터에서 비틀거리더니 힘없이 쓰러졌어요. 우리는 그 쓰러진 물체를 살펴보았어요. 주위가 어두워서 잘 안보였지만 사람 같아 보였어요.

나는 숨을 가다듬고 다가갔어요. 놀랍게도 그 쓰러진 사람은 진수였어요. 언뜻 봐도 크게 다친 것 같았어요. 옷은 무엇에 찢긴 것인지, 너덜너덜 거렸고 피투성이가 돼있었어요. 나는 서둘러 쓰러진 진수를 뒤집고 부축했어요. 앞쪽은 더욱 처참했어요. 온 몸이 피투성이였고, 무슨 일을 당했는지 갈비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어요. 자세히 보니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날카로운 것에 찢긴 것처럼 긴 상처가 깊이 나있었어요. 경아는 진수의 끔찍한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어요. 진수는 가냘프게나마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나는 당황하며 진수를 흔들어 깨웠어요.

“진수야! 무슨 일이야. 일어나봐!”

진수는 내 말에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며, 못 알아들을 정도로 희미하게 말을 했어요. 그 말을 하는 진수 얼굴에는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숲... 숲속... 에 뭔... 가 빨... 리 가...”

숲속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한데, 진수의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어디로 가라는 건지. 상처를 봐서는 무시무시한 일을 당한 것 같은데, 알 수가 없었어요. 우선 가져온 수건으로 대충 상처를 감싸 맸어요. 진수가 신음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나로서도 심각해 보였어요. 자기 상처에 괴로워하던 세영이도 진수의 심각한 상처를 보고, 걱정하고 있었어요.

저는 나름대로 이유를 추측해 보았어요. 진수가 물을 찾는다고 숲에 들어갔다가, 손전등을 가지고 자고 있는 멧돼지나 산짐승을 깨워 상처를 입은 것 같았어요. 우선 그 산짐승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니, 나와 경아는 진수를 부축해 차로 옮겼어요. 진수는 정신이 오락가락하는지, 계속 알아듣지 못한 얘기만 했어요. 기울어져 있는 차의 뒷문을 간신히 열어 진수를 뒷자리에 겨우 눕혔어요. 그런데 진수를 자리에 눕히자, 갑자기 벌떡 일어나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을 짓고, 숲을 바라보고 힘겹지만 필사적으로 뭔가를 말했어요.

“위험... 해. 빨리... 가. 빨리... 나를... 놔... 두...”

진수는 곧 정신을 잃었고,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세영이의 상태도 심각해지고, 진수는 우리가 보기에도 사경을 헤매는 것 같았어요. 이 길은 어떻게 된 것인지 지나가는 차는 하나도 보이지 않고, 숲 저쪽 너머에는 불안하게도 뭔가가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진수를 그렇게 만든 그 무언가가.

여기서 앉아서 막연히 기다리기에는 진수의 상태가 너무 심했어요. 누군가가 도움을 청하러 가야했어요. 경아와 나는 사태를 직감하고 서로를 쳐다봤어요. 세영이는 도저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거든요. 세영이는, 진수는 자기가 돌볼 테니 우리보고 도움을 청하러 가라고 했어요. 하지만, 움직일 수도 없고 고열에 시달리는 세영이에게 혼수상태인 진수를 맡기고 우리 둘만 여기를 떠날 수만은 없었어요. 더군다나 숲에서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숲속에서 진수를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이 멧돼지나 산짐승이라고 하더라도 몸이 온전치 않은 둘만 남기고 떠날 수는 없었어요.

결국에 내린 결론은 경아와 나 둘 중 한 명만 남고, 한 명은 도움을 청하러 가야한다는 것이었어요. 힘든 결정이었어요.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경아가 갑자기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어요.

“재혁 씨가 도움을 청하러 가. 아무래도 재혁 씨가 뛰어가는 것이 내가 가는 것보다 빠를 거 아냐. 조금이라도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진수 씨는 위험하게 될 것 같잖아. 나는 괜찮으니까 재혁씨가 빨리 가. 무슨 일 없을 거야. 차안은 안전하겠지. 짐승이라도 불빛이 나오는 헤드라이트 근처로 접근하지 않을 거 아냐.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세영씨가 지켜줄 거야. 그렇죠? 세영 씨. 그러니 재혁 씨 내 걱정 말고 빨리 도움을 청해와.”

“그래도. 경아야. 너를 여기 두고 가는 것은.”

“괜찮다니까. 대신 빨리 와야 돼. 나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서울에서처럼 많이 기다리게 하진 않겠지.”

계속해서 경아는 망설이는 나를 설득했어요.

진수의 상태는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고, 빨리 결단을 내리고 움직여야 할 것 같았어요. 하지만 경아를 여기다 놓고 간다는 것은 쉽게 결단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결국은... 나의 바보 같은 선택이 경아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가끔은 어떤 선택을 했던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자위를 하지만, 그것은 내 편의대로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경아는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니까. 내 책임이죠. 경아가 나 대신 도움을 구하러 갔으면. 변명 같지만 그때로써는 내가 도움을 구하러 가는 것이 최선의 선택으로 생각되었어요.

경아는 나를 보챘어요.

“재혁 씨, 나는 무서워서도 혼자 도움을 청하러 가지 못한단 말야. 여긴 진수 씨도 있고 세영 씨도 있으니 안심하고 빨리 갔다 와. 대신 나랑 약속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돌아오기로.”

나는 경아가 무서워하면서도 그것을 꾹 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어요. 결정하기 어려운, 하지만 빨리 결정해야 할 순간이었어요. 나는 그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결단을 내렸어요. 내가 혼자 도움을 청하기 위해 가기로 한 거죠. 경아의 손을 꼭 붙잡고 나는 맹세하듯이 얘기했어요. 결국 지키지도 못한 헛소리였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올게. 한 시간만 있으면 돌아올 수 있을 거야. 미안해. 그리고 고맙다. 친구들을 잘 돌봐줘. 야, 세영아, 경아 좀 부탁한다. 금방 다녀올게.”

세영이는 그때만 해도 정신이 들었어요. 내말을 듣고 미안해하면서, 나와 경아가 같이 가라고 연신 권했죠. 진수는 자기가 보살피면 된다면서. 하지만 세영이도 말로는 그렇게 했지만, 점점 심각한 상태가 돼가고 있어요. 발목이 삔 것 이외에도 머리를 다쳤는지, 열은 자꾸 올라갔고 가끔 기절하듯이 정신을 잃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니 이 친구들만 남기곤 떠날 수 없었죠. 아니 모르겠어요. 나만 살기 위해서 거기서 도망친 것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나 역시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죠. 결국엔...

여하튼 우리가 왔던 길을 돌아보니 불빛 한 점 안 보이고, 어두침침하고 안개가 짙게 껴있어 경아 혼자 가기에는 너무 음침해 보였어요. 결국 나는 진수가 쓰러질 때 떨어뜨린 플래시를 들었어요. 경아와 세영이를 차에 태우고, 트렁크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앞으로 옮겨놨어요. 쓸 만한 물건들이라고 해봤자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작은 과도 하나하고, 자동차에 실려 있는 스패너 같은 연장 따위였어요. 만약 멧돼지 같은 것이 덮친다면, 아무 쓸모도 없을 보잘 것 없는 무기들이었죠.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심리적으론 위안이 되었죠. 그리고 헤드라이트를 상향등으로 켜놓고 짐승이 접근 못할 정도로 환하게 해놨어요. 그리고 대충 나뭇가지를 모아 길에다 불을 피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워온 나뭇가지에 불이 안 붙는 것이었어요. 안개 때문에 젖었는지 아무리 불을 집히려 해도 불이 붙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이 불을 피우는 것을 포기하고 경아에게 차문을 잠그라고 했어요. 사고로 조수석 유리창이 깨지긴 했어도, 문을 잠그니 약간은 안심이 되었어요. 나는 가져온 운동화로 갈아 신고 끈을 맸어요. 그리고 떠나기 전에 차안을 보았죠.

경아는 무서움을 애써 참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내게 빨리 가라며 손을 흔들었어요. 헤드라이트에 비친 그 애의 얼굴이 왜 그리 마음에 걸리는지. 다시는 못 볼 것 같았어요.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경아와 친구들을 뒤로 하고 뛰기 시작했어요. 한시라도 빨리 도움을 청해서 이 악몽 같은 밤과 이 음산한 숲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리고 남겨두고 온 경아에게로 빨리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았어요. 짙은 안개 때문에 뒤를 돌아보니 백 미터도 못 갔는데도, 차가 있는 곳이 불빛만 희미하게 보일 정도였어요.

나는 플래시를 한손에 들고 안개를 해치고 자동차로 온 길을 따라 달렸어요. 사방에 불빛은 하나도 안 보이고, 내 플래시 불빛만이 길을 밝혔어요. 하지만 그 불빛도 짙은 안개 때문에 거의 무용지물이었어요. 달리면서 왜 차가 한 대도 이 길을 지나지 않는지 다시 의문이 들었어요.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서울과 설악산을 오가는 국도에 이렇게 차가 없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요술에 홀린 것 같았어요.

여하튼 한 10분쯤 달렸을까. 어느 순간 나는 구름 속을 헤치고 가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내가 도대체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마음은 급했지만, 아무리 달려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마치 뫼비우스의 띠 위를 계속해서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마음이 불안해서인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무엇이 쫓아오는 듯한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어요. 또 저 어둠저편에서 무언가가 나를 감시하는 것 같았어요. 점점 무서워져서 숨은 가빠왔지만 더 빠르게 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잠시라도 멈추면 그것이 나의 목덜미를 낚아챌 것 같았어요.

얼마를 그런 공포 속에 달렸을까.

저 앞에 희미하지만 불빛 같은 것이 보였어요. 얼마나 반가웠는지,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었어요. 그 동안의 긴장이 풀렸는지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고, 숨이 더욱 가빠졌어요. 나는 뛰는 것을 멈추고, 헉헉대면서 걸어서 불빛을 향해 걸어갔어요. 불빛은 점점 가까워졌어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그 불빛은 길가가 아닌 길 위에서 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길가 집이나 휴게소가 아닌 자동차에서 나오는 불빛 같았어요. 그래도 아무래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걸음을 재촉했어요. 그 불빛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서있는 것 같았어요. 불빛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상하게도 불안해졌어요. 뭔가 정상적이지 않고 이상해 보였어요.

안개를 헤치고 더욱 가까이 갔어요. 그 불빛은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맞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 헤드라이트 불빛은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 불빛의 실체를 보는 순간, 충격을 받고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더군요. 차는 외국 벤 같은 미니버스였어요. 그런데 그 차는 옆으로 뒤집혀 있었고, 헤드라이트 불빛은 그 전복된 차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었어요. 이 차도 교통사고가 난 것 같았어요.

나는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차로 다가갔어요. 누구 없냐고 소리를 쳐보았으나,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어요. 단지 비상등이 깜박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어요. 좀 더 다가가니 차에서 기름이 새는지 휘발유 냄새가 풍겨왔어요. 이유도 모르게 차에 가까이 갈수록 온몸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어요. 차에 다다르자, 나는 그 끔찍한 광경에 정신을 잃을 정도로 충격을 받았어요. 몸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더군요. 제기랄.

지금도 그때 생각만하면 잠을 못자고, 구역질이 나요. 여러 구의 시체가 차 주위에 토막 나거나 난도질당한 채로 널려져 있었어요. 차 주변은 피로 범벅이 되어있고, 피비린내와 휘발유 냄새가 역겹기까지 했어요.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구역질을 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처음에는 교통사고로 타고 있던 사람들이 심하게 다쳐있는 것으로 보였어요.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둘러보자 그것이 아닌 것을 느꼈어요. 아무리 무섭고 구역질이 났지만, 기자라는 직업의식이 무의식중에 발동했는지 자세히 시체들 -아니 그때는 이미 사람의 형상을 못 알아볼 정도로 처참한 시체도 있었지만- 을 살펴보았어요. 혹시나 생존한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으니까요.

시체는 차 주변에 대략 7구가 있었는데, 대충의 체격을 봐서는 젊은 남자들 같아 보였어요. 외국 벤에 민조산악회라 써 있는 것을 보니 등산을 가던 젊은이들이 변을 당한 것 같았어요.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시체는 머리가 아예 보이지 않았고, 어떤 시체는 팔과 다리가 잘려있고, 어떤 시체는 머리에 화살 같은 것이 박혀있었고, 어떤 시체는 심장부위가 파져있었고...

너무 끔찍했어요. 마치 악마가 이 자리를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어요. 등산용 망치나 지팡이, 산악용 칼들과 텐트를 박는데 쓰는 지주들이 여기저기 시체들의 몸에 잔인하게 박혀 있는 것을 보니, 서로가 죽이기 위해 싸운 것으로도 보였어요. 하지만 상처의 잔인성으로 봐, 제 정신의 인간으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것 같았어요. 이런 사건을 보니 두려움과 함께 기자의 호기심이 발동했어요. 바보같이.

차는 가벼운 전복인지 생각보다 많이 상해있지 않아 보였어요. 그리고 차 안에 핏자국이 별로 없는 것으로 봐, 차가 뒤집힐 때 다친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어요. 차 앞에 돗자리와 술병과 그릇들이 널러져 있는 것을 보니 이들도 우리처럼 도움을 기다리다 술판을 벌린 것 같았어요. 그러다 무슨 일이 난 것이고.

갑자기 이들을 이렇게 만든 존재에 대해 생각이 미쳤어요. 만약 이들이 서로 싸우다 죽인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가 이들을 이렇게 처참하게 만든 것이라면... 점점 내 이런 생각이 맞는 것 같아졌어요. 왜냐하면 사람이 아무리 증오를 가지고 서로 죽이려 했다고 해도, 심장을 파내고 머리와 팔다리를 잘라낼 리는 없을 것 같았어요.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여기를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가 숲에서 튀어나와 나를 이렇게 만들까 겁이 났어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어요. 공포심이 극도에 달하자 어지럽기까지 했어요. 지금이라도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 나를 덮칠 것 같았어요. 바로 그 순간, 무서워하면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경아가 떠올랐어요. 그리고 내가 이 길을 달려온 목적이 생각났어요.

나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엎어진 차로 가 필요한 물건이 있나 살펴보았어요. 불행 중 다행이라 산행을 준비했던 사람들이라 쓸 만한 게 몇 개 있었어요. 우선 다친 친구들을 위해 구급가방을 하나 집어 들어 어깨에 들쳐 메고, 혹시 무슨 일이 날까 두려워 작은 손도끼를 집어 들었어요. 그런데 짐을 뒤지다 보니 시체들의 몸에 박힌 화살 같은 것들을 넣은 통이 보였어요. 통을 읽어보니 ‘사냥 석궁용 화살’ 이라고 써 있었어요. 이 죽은 사람들은 등산뿐만 아니라 석궁을 이용해 사냥할 생각이었나 봐요. 나도 모르게 석궁을 찾아보았으나 차안에는 없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를 것 같아 화살 통은 손도끼와 같이 챙겼어요. 나도 참 대담하지 않아요?

그렇게 잔인한 시체들이 너부러져 있는 한복판에서 그런 물건이나 챙기고 있었다니. 어쩌면 그때부터 나는 사람이 아니고 악마가 된 것인지도 모르죠. 여하튼 이렇게 필요한 짐을 챙겼어요. 그리고 경아 있는 데로 돌아갈까, 아니면 도움을 청하러 계속 갈 것인가 망설였어요.

그런데 갑자기 저기서 부스럭 소리가 나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놀랐는지 정신을 잃을 뻔했어요. 나는 손도끼를 쥔 손에 힘을 주고, 그 소리 난 쪽으로 플래시를 비추었어요. 바로 내가 서있는 데로부터 한 5미터 떨어진 곳에 너부러져 있는 시체에서 난 소리 같았어요.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갔죠. 그 시체의 바로 앞까지 다가갔을 때, 갑자기 그 죽은 시체가 팔을 번쩍 드는 것이었어요. 너무 놀랐어요.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있던 것이었어요. 그 사람 옆에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펴보았어요. 아까 둘러볼 때, 그의 심한 상처로 죽은 것으로 착각한 것 같았어요. 갈비뼈가 드러나고, 내장이 흘러나올 정도로 가슴과 복부 부분에 심각한 상처가 있었고, 한쪽 다리는 뭐에 물어뜯긴 것처럼 너덜너덜해 보였어요. 그 사람은 그런 상처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던 것이었어요.

신음소리를 내는 그 사람을 흔들었어요. 그는 간신히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어요. 한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그 사람의 얼굴은 피범벅이 되어있었어요. 그는 나를 알아보려고, 한참을 힘겹게 쳐다보았어요. 그러더니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얘기를 시작했어요.

“당... 신. 누... 구... 요?”

“저도 저 앞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도움을 청하러 가다가 불빛이 보여서 왔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죠?”

“당신... 도 교... 통... 사고.”

그러더니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려했어요. 보다 못한 내가 고개를 부축해 주자, 주위에 너부러져 있는 시체들을 살펴보았어요. 나는 그의 상처를 어떡해서든지 치료해볼까 생각해 보았지만, 구급가방 하나로 의학지식이 전혀 없는 내가 이렇게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는 손 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그는 자기 상처는 개의치 않는 듯 얘기를 했어요.

“다들 죽... 어 있... 나... 요.”

“예, 대충 보았지만, 상처로 보아 다들 죽어있는 것 같아요.”

그는 다 죽어있는 것 같다는 내 대답을 듣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어요.

나는 처음에는 그 사람이 친구들이 죽은 사실을 부정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죠. 하지만 곧 깨달았어요. 고개를 젓는 것의 본래 의미는 부정이라는 것을.

“아니요. 곧 움직일 테니. 빨리 도망... 가요. 당신도 교통... 사... 고 숲에... 는 절대... 들어가지... 마요. 만... 약 누군가가... 숲에... 들어... 가... 서 다쳐... 왔... 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소중한... 사람... 이라도... 죽여... 요. 늦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람... 다치... 게... 한... 사람... 들도. 모두... 늦... 으면... 우리처럼... 돼요. 서두... 르세... 요...”

나는, 그때는 그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어렵게 말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진수가 떠올랐고, 그 자식이 숲에서 다치고 들어온 뒤 한 헛소리가 떠올라 기분이 찜찜했지만, 그래도 무엇을 얘기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어요.

그는 간신히 몸을 뒤척여, 자기가 깔고 있었던 피 묻은 석궁을 보여주며 가지라고 하더군요. 필요할 것이라며.

“이것이라도... 가져... 가요. 도움 되지... 는 않... 겠... 지만... 없는... 것... 보다... 나...을 거요. 그리고 라이... 터... 좀... 주... 시... 오.”

나는 석궁을 집어 들면서, 그에게 라이터를 쥐어줬어요. 이런 상황에서 그가 라이터를 찾는 이유가 이상하긴 했지만 죽기 전에 담배나 필 생각인가 했어요.

순식간의 일이었어요.

그는 누워서 간신히 라이터를 켰어요. 그러더니 자기 몸에 불 켜진 라이터를 갔다대는 것이었어요. 그 순간 불이 확 붙더니 사방으로 퍼지는 것이었어요. 그 사람의 몸과 사방에 휘발유가 흘려있었나 봐요. 너무 창졸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그 사람에 붙은 거센 불을 어떡해서라도 꺼보려고 했어요. 하지만 불은 잡히지 않고, 그는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나에게 처절하게 절규했어요.

“빨... 리 여기서... 벗... 어나... 요. 내... 말... 명심... 하고!”

그가 붙인 불은 사방의 모든 시체에까지 붙었어요. 그리고 그가 일부러 그랬는지, 휘발유를 따라 불길은 뒤집혀있는 자동차에게도 옮겨 붙었어요. 나는 연료통이 곧 터질까봐 뒷걸음질 쳤어요.

그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죽은 줄만 알았던 시체들이 불이 붙자 괴로운 듯이 움직이며 일어났어요. 나는 처음에는 그 사람처럼 죽지 않는 사람들이 몸에 불이 붙자 고통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 불길에 싸인 일어난 사람들을 자세히 보자 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발길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 일어난 사람은 목이 없고, 심장이 뽑힌 시체도 있었어요. 죽은 것이 분명한 시체들이 불길 속에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 거예요.

나는 두려움과 공포로 움직일 수 없었어요. 그 불에 타고 있는 시체들은 내 쪽으로 움직여왔어요. 나는 뒤를 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무서워서 뒷걸음질조차 힘들었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악몽인 것 같았어요. 하지만 불길의 뜨거운 열기는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식시켜 주었죠. 움직이던 시체들 중 두세 개는 불에 심하게 타 쓰러지기도 했지만, 나머지는 계속해서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죠.

그 순간 ‘꽈꽝’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폭발했어요. 나는 그 충격에 공중에 붕 떳다가 뒤로 내동댕이쳐졌어요. 내게 걸어오던 시체들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요. 아무리 연료탱크가 터졌다 하더라도, 차의 폭발치고는 너무 위력이 컸어요. 나중에 안일이지만, 차에 실려 있던 부탄가스 한 박스가 같이 폭발했데요. 그래서 그 시체들과 함께 모든 증거들은 날아가 버렸죠. 덕분에 나중에 경찰은 단순 벤 전복사고에 운 나쁘게 휘발유가 세어나가 부탄가스와 함께 폭발해, 타고 있던 사람들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사망한 것으로 처리했죠. 내말은 하나도 믿지 않고. 여하튼 폭발로 한 3미터 날아간 나는 오른쪽 무릎이 약간 아플 뿐 멀쩡한 편이었어요. 정신을 추스르니, 그 불속에서 움직이던 목 없는 시체들이 생각났어요. 소름이 쫙 끼쳤죠.

그런 와중에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경아를 생각했어요. 죽어가던 그 사람이 했던 경고와 숲에 들어가 다쳐왔던 진수의 일도 떠올랐어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옴을 느꼈어요. 여기의 끔직한 일 같은 그 뭔가가 거기서도 발생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대충 석궁과 손도끼 그리고 구급 가방을 메고 우리차를 향해 뛰기 시작했어요. 도움을 청하러 가기도 가야 하지만, 무슨 일이 발생한 것 같은 불안함이 강하게 느껴졌어요. 아마 근처에 사는 사람이 이 폭발을 보고 올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한가하게 사람들을 앉아서 기다려서는 안 될 것 같았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차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았어요. 내가 보고 듣고 한 것을 내 자신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빨리 돌아가 경아를 구해줘야 할 것 같았어요. 올 때는 한 30분 남짓 걸린 길이 돌아갈 때는 훨씬 오래 걸리는 것 같았어요. 숨은 가빠왔지만, 차가 나타나지 않아 점점 초조해졌어요.

어느 새 짙게 깔려 있던 안개는 걷혔어요. 길 양편으로 늘어선 나무들이 음산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 나무들이 플래시 불빛에 보여주는 기분 나쁜 그림자는 길과 함께 보여 지니, 문득 악마의 벌린 입처럼 느껴졌어요.

나는 그 악마의 입속으로 자진해서 뛰어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뛰면서도 소름이 끼쳤어요. 한동안 무슨 체력으로 그렇게 뛰었는지, 저 멀리 불빛과 함께 경아가 있는 차가 보이기 시작했어요. 나는 혹시나 하는 불안함과 이제 다왔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어요. 하지만 다가갈수록 뭔가가 발생했을 것 같은 느낌이 자꾸 들었어요.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차로 뛰어갔어요.

멀리서 보이는 차는 내가 떠날 때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어요. 가까이 다가가자,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어요. 차안에 누어있어야 할 애들이 길에 나와 있는 것이었어요. 켜 놓은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희미한 불빛아래 언뜻 멀리서 보니, 누워있는 사람에 다른 사람이 올라타 인공호흡이라도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발걸음을 더욱 빨리 했어요. 가까이 다가가 올라탄 사람의 뒷모습을 보니 진수 같았고, 누워서 인공호흡을 받고 있는 사람은 세영이 같았어요. 나는 진수가 그렇게 심한 상처인데도 움직일 수 있으라고 상상도 못했어요. 그런데 세영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인공호흡까지 해주고 있는 것이에요.

경아는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진수가 괜찮은 것 같아 그래도 좀 안심이 되었어요. 숨을 가다듬고, 나는 좀 더 다가가 인공호흡하고 있는 진수의 등에다 대고 물었어요.

“진수야, 뭐하고 있는 거야? 세영이에게 무슨 일 생겼니? 그리고 경아는 어디 있는 거야?”

진수는 내 질문에 인공호흡을 멈추고 나를 천천히 돌아보았어요. 그 순간 나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끼며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천천히 돌아보는 진수의 입에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어요. 진수의 눈에는 악마의 눈에서 밖에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광기가 흐르고 있었고, 진수는 세영이를 인공호흡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어요. 세영이의 살점을 물어뜯고 있던 거였어요. 나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 얼어붙은 듯이 움직일 수 없었어요. 처음에는 설마 했죠. 갑자기 주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나의 가쁜 숨소리와 진수의 사람 목소리 같지 않은 그륵그륵 거리는 소리만 그 적막을 깼어요. 그 순간 실제로 시간은 1분도 지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내에게는 영원과 같이 느껴졌어요. 그 불안한 평행상태를 깬 것은 진수의 끔찍한 울부짖음이었어요. 인간의 목소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괴성을 하늘을 향해 내짖더군요. 마치 먹이를 먹다 방해받은 야수처럼.

그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죠. 그리고 소리쳤어요.

“진수야! 왜 그러는 거야? 정신 차려! 임마!”

그때만 해도 나는 진수가 심한 상처 때문에 무슨 충격을 받아 그런 이상한 행동을 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진수는 내 말에 대꾸 대신 몸을 일으켜 순식간에 나를 덮쳐왔어요. 플래시에 비친 진수의 얼굴은 정말 끔찍했어요. 쩍 벌린 입 주변에는 피가 시뻘겋게 묻어 있었고, 눈은 광기어린 흰자만 허옇게 보였고, 짐승처럼 네발로 기어서 내게 다가왔어요. 피 묻은 진수의 이빨은 사람의 이빨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게 보였어요. 마치 네발달린 짐승같이 빠르게 나를 덮쳐왔어요. 입에 피 칠을 하고 네발로 뛰어오는 모습이란. 순간적으로 내가 공포영화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어요.

진수가 달려드는 것은 순간이었어요.

나는 본능적으로 덮쳐오는 진수를 피하려 했으나, 너무 빨라서 피하지 못했어요. 큰 충격과 함께 어느새 진수는 나를 쓰러뜨리고, 위에 올라탔어요. 진수는 괴성과 함께, 피 묻은 입을 쫙 벌리며 나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밀어냈죠. 하지만 진수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내 손을 가볍게 밀어젖혔어요. 나둥그러진 플래시 불빛에 반사된 진수의 얼굴은 정말 무시무시했어요.

나는 미친 듯이 소리쳤어요.

“진수, 이 새끼야! 뭐 하는 거야. 정신 차려!”

하지만 진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려 했어요.

나는 그때 순간적으로 희멀건한 진수의 광기어린 눈에서, 슬픔 같은 것을 느꼈어요. 나의 착각 같았지만, 자기를 용서해달라는 것 같았죠. 아마 그 다음에 내가 진수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죄책감에서 나온 상상일지도 모를 거예요. 여하튼 진수의 피묻은 짐승같이 날카로운 이빨은 나의 목덜미에 점점 다가왔어요. 우습지만 나는 흡혈귀에 물리는 희생자가 된 기분이었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오른손으로 진수의 얼굴을 막으며, 왼손으로 더듬으면서 진수가 덮쳤을 때 어딘가 떨어져있을 작은 손도끼를 찾았어요. 진수를 막고 있는 오른손의 힘은 점점 빠지고, 피 묻은 이빨은 거의 내 목을 물어뜯을 것 같았어요.

정신마저 혼미해졌죠. 악몽을 꾸는 것 같았어요. 꿈에서는 이러다가 깨기 마련인데, 점점 억눌린 몸이 아파왔어요. 이렇게 괴상하게 모든 게 끝이구나 생각했는데, 왼손 끝에 뭔가가 건드려 지는 것이었어요. 간신히 고개를 돌려보니, 손도끼가 손끝에 닿을 듯 보이는 것이에요. 정말 죽을힘을 다해서 손을 뻗었죠.

그때는 이미 진수의 이빨은 내 목에 거의 닿았죠. 손도끼 손잡이가 왼손에 잡히자마자, 나를 억누르고 있는 진수의, 아니 괴물이라고 하는 것이 마음 편하겠죠. 그의 어깨를 힘껏 내리찍었어요. 순간 내 얼굴과 몸은 피범벅이 되었고, 진수는 옆으로 나동그라졌어요.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지친 몸을 일으켰어요. 내가 찍은 곳은 진수의 오른쪽 어깨였어요. 거기서 철철 흘러나오는 피를 보니, 내 자신이 격양되는 것을 느꼈어요. 좀 부끄럽긴 하지만, 살았다는 쾌감과 이유 모를 통쾌함을 느꼈어요.

이상하죠. 하지만, 다음 순간 피를 흘리고 있는 진수를 보자, 너무 당황되었어요. 내가 친구를 도끼로 내려친 거예요. 아무 영문도 모르고 인간 속에 내제된 야수의 공격 본능이 폭발한 것처럼, 무자비하게 친구를 도끼로 찍은 거죠.

나는 친구의 피가 묻은 손도끼를 떨어뜨리고, 쓰러져있는 진수에게 다가갔어요.

“진수야, 괜찮니? 미안해. 나도 모르게. 이제 정신 좀 차려.”

진수는 대답 대신에 괴성과 함께 벌떡 일어나, 오른 팔을 크게 휘둘러 나를 쳤어요. 사람처럼 주먹으로 나를 친 것이 아니라, 무슨 짐승처럼 팔을 휘둘러 쳤어요. 무슨 괴력이 생겼는지, 나는 진수에게 얻어맞는 순간 큰 충격을 받고, 몸이 붕하고 날라 갔어요. 한 2,3미터 공중으로 떴다가 아스팔트 바닥에 호되게 내동댕이쳐졌어요. 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특히 무릎에 큰 통증을 느꼈어요.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죠. 차가 터질 때 다쳤던 그 다리를 또 다친 거예요.

아픔 때문에 일어서지도 못하고, 무릎의 통증을 이를 악물고 참고 있는데, 진수가 방금 전보다 더 끔찍해진 모습으로 내게 기어오는 것이었어요. 어깨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입에는 아직 피가 묻어있고, 그 눈에는 나에 대한 증오가 가득했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다친 다리 때문에 일어나기가 힘들었어요. 진수는 점점 다가오고, 짐승과 같은 거친 숨소리는 점점 크게 들렸어요. 발버둥을 치면서 진수에게서 멀어지려고 했어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손도끼는 보이지도 않았어요.

진수는 순식간에 몸을 날려 나를 덮쳤어요. 다리가 다시 충격을 받으면서,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어요. 진수는 어느새 나를 타고 올라 괴성을 지르며 목을 물어뜯으려 했어요. 다리의 뼈가 뒤틀리는 듯한 통증으로 저항할 수도 없었어요. 진수는 자기의 얼굴을 막으려는 내 손을 무시무시한 힘으로 비틀었어요. 엄청난 고통과 함께 내 왼팔은 ‘우드득’ 소리가 나며 비틀어졌어요.

나는 아픔에 비명을 질렀어요. 진수, 아니 이제부턴 괴물이라고 하죠. 그 진수의 탈을 쓴 괴물은 내 왼팔을 무자비하게 비틀고 나서,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즐기는 듯 천천히 바라보았어요. 오른팔은 이미 강철 올가미 같은 그놈의 왼손에 잡혀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반항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그놈은 더 이상 내가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어요. 왼팔은 탈골되고 인대가 끊겼는지 힘을 줘도 움직일 수 없었어요. 그놈은 나의 무기력한 모습을 보고 즐기는 듯 했어요. 마치 뱀이 개구리를 구석에 몰고 혀를 낼름거리며, 삼키기 전에 응시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피 묻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목을 물으려 했어요.

나도 모르게 무서워서 눈을 감았어요.

그런데, 다음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놈의 머리에 도끼가 박혔어요. 그놈은 피를 흘리면서 내 몸 위에서 저쪽으로 쓰러졌어요. 그놈의 머리에서 피를 뿜어대는 것과 쓰러지면서 온몸의 맥이 풀어지는 것을 보니, 죽은 것 같았어요.

놀라서 보니, 세영이가 헉헉거리면서 힘겹게 서있는 것이었어요. 그리곤 힘없이 내 옆에 쓰러지는 것이었어요. 세영이가 어느새 손도끼로 나를 구해준 것이었어요. 나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영이에게 기어갔어요. 세영이의 몸은 엉망진창이었어요. 온 몸이 피투성이였고, 오른쪽 가슴 부분은 진수, 아니 그놈에게 심하게 물어 뜯겼는지 뼈가 다 보일 정도였어요. 얼굴도 무엇인가에 심하게 긁혔는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요.

나는 세영이를 흔들며 소리쳤어요.

“세영아!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진수는 어떻게 된 거야? 무슨 말 좀 해봐!”

세영이는 나의 외침에 간신히 눈을 뜨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해줬어요.

“재혁아. 다행이구나. 너는 괜찮은 것 같구나. 저건. 진수가아냐. 그냥 짐승... 같은... 괴물... 일뿐야. 빨리... 도망가. 빨리. 나는 이제 틀... 렸으니까. 나를 버리고... 빨리...”

나는 세영이의 얘기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세영이는 너무나 고통스러운지 신음소리만 계속 낼 뿐 말을 잇질 못했어요. 나는 경아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이 너무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온갖 나쁜 상상이 머릿속에 가득 찼어요. 나는 계속해서 정신이 혼미해 보이는 세영이를 다그치면서 외쳤어요.

“야, 임마, 정신 차려! 어떻게 된 일이냐니까? 경아는 어디 있어? 무슨 일 난거야? 경아는 어떻게 된 거냔 말야!”

세영이는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을 정도로 부정확하게 말을 이었어요.

“경희... 경아... 잘 있지. 경희... 가... 보고... 싶... 다. 나... 이제... 못... 보겠...지. 경아 씨도... 못... 보겠지. 재... 혁아. 살... 아... 줘...”

“정신 차리란 말야! 경희 씨 말고 경아가 어떻게 됐냔 말야. 제발! 얘기 좀 해보라니까. 제발!”

세영이는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어요. 내가 경아에 대해서 물어보는데도, 자기 여자 친구인 경희에 대해서 대답하는 것이었어요. 아니면 부정확한 발음에 내가 헛갈렸는지도 모르죠. 여하튼 나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어요. 계속해서 세영이를 흔들어 대며 경아에 대해 물어보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세영이에게 못할 짓을 한 셈이죠. 제기랄.

세영이의 상처가 깊고 처참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정도로 위독할지는 경아 생각 때문에 상상도 못했어요.

“세영아! 경아 어딨어?”

세영이는 대답대신 신음 소리를 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이 한마디 하려고 했어요.

“경... 아... 씨는 차... 트... 러... 엉...”

그리곤 마지막이었어요.

세영이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어요. 나는 그때까지 만해도 세영이가 그렇게 죽어 가리라고는 믿지 않았어요. 나는 설마하고 세영이를 힘차게 흔들었어요. 경아가 차 어디에 있다고 말했지만, 잘 알아듣지 못했어요. 세영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어요. 나는 세영이를 흔들다 지쳤어요. 다친 다리와 탈골된 왼팔은 점점 아파왔어요. 세영이를 내려놓자, 머리가 힘없이 돌아가는 것이었어요.

나는 무서움을 느끼며, 세영이의 가슴에 귀를 대보았어요. 아무런 소리가 안 들렸어요. 그때의 충격이란. 친구 둘이 생각할 수도 없는 일로 순식간에 죽어버린 것이었어요.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은 슬픔이라기보다는 공포심이었어요. 무언가가 우리를 서로 죽이게 만들었고, 그것으로 벌써 둘이나 죽은 것이었어요. 나는 무서움에 떨며, 나도 모르게 세영이의 시체에서부터 떨어지려고 몸부림쳤어요. 친구의 죽음을 보고, 내가 그런 행동을 하다니. 미친놈이나 다름없죠. 내는 내가 그렇게 이기적이란 놈인 것 그때 깨달았어요. 극한 상황이 되니, 친구의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살길만 찾았으니. 인간의 이기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되었어요. 그 동안 내가 말하고 행동한 것이 얼마나 위선적이었고, 내가 썼던 기사들이 위선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내 머리에 가득 찬 생각은 빨리 경아를 찾아, 이 지옥에서 도망치는 것이었어요. 간신히 몸을 일으켰어요. 세영이의 마지막 말을 생각해보니, 자동차 트렁크라는 것 같았어요. 왼쪽 다리의 통증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 없었어요. 비틀거리며 차로 향했어요. 적막함과 숲의 어두움이 나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공포심으로 몰아넣었어요. 뭔가가 절뚝거리는 나의 뒤에서 나타날 것 같았어요. 최대한 빨리 걸었죠. 혹시나 하고 손도끼를 찾았지만, 생각해보니 세영이가 진수의 머리에 찍어 놓은 것 같았어요.

언뜻 진수가 쓰러져있는 곳을 봤어요. 이상하게도 진수의 시체는 원래 쓰러진 곳에서 약간 내 쪽으로 가까워진 것처럼 느껴졌어요. 갑자기 섬뜩함이 느껴졌어요. 애써 나의 겁에 질린 착각으로 생각하고, 차로 향했어요.

자꾸 뭔가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 같아 걸음을 빨리 했어요. 쫓기는 사람처럼 차로 다가갔어요. 가까이 갈수록 차에선 무슨 소리인가 들리는 것 같았어요. ‘쿵쿵’ 하는 소리 같았어요. 무슨 소리인가 궁금해 하며 차로 다가가는 순간, 뭔가가 바로 내 등에 서있는 것 같았어요. 두려운 마음과 함께 돌아보았어요.

세상에! 내 뒤에는 진수가 머리에 도끼를 박은 채 피를 흘리며 서있는 것이었어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어요. 소름이 쫙 끼치고, 움직일 수 없었어요. 헛것을 보는 듯 했어요.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머리에는 분명히 도끼가 박혀있는 채로 퀭한 눈으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것이었어요. 다음 순간 무시무시한 힘을 나를 번쩍 들더니 집어 던졌어요. 세상이 거꾸로 돌더니, 엄청난 고통과 함께 떨어져 나갔어요. 왼팔과 다리의 아픔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어요.

정신을 추스르고 있는데, 철거덕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어요. 간신히 눈을 뜨고 보니, 괴물 같은 진수가 비틀거리며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어요. 이번엔 네발이 아닌, 두발로 걸어오는 것이었어요.

나는 몸을 필사적으로 일으키면서, 주위에 무기될만한 것을 찾아보았어요. 쓸 만한 것은 보이지도 않고, 전에 먹다 남은 음식과 술병들이 보였어요. 그 중에 우리가 마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