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까지는 평 안썼는데 등업시켜주셨으니 저도 영화평좀 남겨볼까 합니다.

주온은 제가 상당히 남다르게 본 영화인데요.

이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던 간에, 이 영화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이미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 있죠.

미국에서 그루지의 성공으로 제작자인 샘 레이미가 시미즈 감독에게 사정해서

2편을 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영화를 보는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장르에 따라서 구분한다면,

액션&코미디는 속풀려고 보는 거고,

해피&멜로는 대리만족,

새드&드라마는 카타르시스?

그럼 공포는?

'무서워하고 싶은' 사람은 없죠. 누구나 행복감만 느끼고 싶을 겁니다.

하지만 공포영화를 즐기는 사람은 무서운 것을 보면서 주인공의 절망적 상황,

영화가 끝나고 자신이 영화 속이 아닌, 현실에 있다는 안도감 등,

지금 편안히 팝콘을 먹고 있는 나와는 전혀 다른 긴박한 상황을 보면서

스릴을 느끼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겁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는데요. 다시 주온 얘기로 돌아와 봅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영화가 개봉하면, 그 장르의 목적에 충실했느냐가 가장 먼저

영화를 평가하는 잣대가 됩니다.

액션은 화려한가? 코미디는 웃긴가? 공포는 무서운가??

그래서 처음 주온이 개봉했을 때

매우 무섭다, 고로 최고다 vs 안무섭다, 고로 별로다

식의 쟁론이 한창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주온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이 영화가 기존의 헐리우드나 한국식 영화와는 그 방법론에 있어 전혀 다른,

'무조건 무섭기'를 떠나서 가장 장르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공포영화를 분류할 때 공포의 대상과 스타일에 따라 동서양으로 나누는데요,

주온 개봉 이전과 이후 공포영화의 구조가 대단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한국영화는 서양식 이야기 구조를 따랐습니다.

1.일상생활-2.공포의대상 출현-3.주인공 일행의 사투-4.일행의 죽음과 공포감의 고조-5.주인공의 극복과 갈등 해소-6.사건 종결과 일상생활로의 회귀

그 대상이 소복입은 귀신이던, 전기톱을 든 살인마던 별로 예외가 없이 이러한 공식을 따랐는데요.

이를 벗어난 영화가 일본의 '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링은 6번까지 잘 나가는가 싶더니 다시 2번으로 돌아가며 영화가 끝나죠.

하지만 링2에서는 다시 공식으로 돌아와서 결국 한계를 드러냈는데,

주온의 경우, 그냥 4번에서 영화가 끝납니다. 5번으로 넘어가지도 않죠.

잘 뜯어보면 옴니버스 구성으로 아예 주인공조차 없습니다.

공포영화를 볼 때, 아무리 귀신이 튀어나오고 살인마가 도륙을 저질러도

관객이 안심하는 것은 결국에는 주인공이 모든 사건을 해결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미즈 다카시 감독은 이 점을 잘 활용한 것 같습니다.

처음에 리카가 나오는데 죽지 않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나오면서

하나씩 죽어갑니다. 자꾸만 죽어서 관객은 불안합니다.

중반부를 넘어가면 이미 리카는 기억에 없고,

그냥 나온 사람은 다 죽었다고만 생각합니다.

이제 끝날 무렵, 감독은 리카를 다시 등장시키면서

관객에게 아직 그녀가 남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관객은 감독에게 깜빡 속아서,

‘이제 그녀가 사건을 해결하고 영화가 끝나지 않을까?’

라고 추측하게 되는데요.

감독은 리카가 그 집에 다시 가게끔 상황을 만들어서

관객의 추측을 확신으로 굳히죠.

하지만 아시다시피 엔딩은 철저한 감독의 배신으로 끝납니다.

마치 “원한 앞에서는 사건을 해결할 주인공 따위는 없다.”라고 메시지를

보내듯이 관객의 마지막 안도의 끈마저 빼앗는 시미즈 감독.

여기에 주온의 첫 번째 ‘공포’가 담겨있습니다.

공포심을 제외하고, 스크림이나 13일의 금요일 등을 보면서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요?

바로 잔인하게 죽는 희생자에게 느끼는 동정심이죠.

영화가 권선징악의 구도를 따라가면서 이러한 동정심은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을 응원하게 합니다.

제정신으로 살인마를 이해하는 관객은 없을 겁니다.

다들 ‘아 저 나쁜 X같은 놈’하고 생각하죠.

하지만 이는 액션영화에 필요한 사항이죠,

오히려 공포심을 저하시키는 요인이 됩니다.

주온은 어떨까요?

가야코와 토시오는 매우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원한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 원한이 집에 남아서 방문객을 덮습니다.

이는 한국인의 정서로 충분히 이해 가능한 부분입니다.

주온에서는 사람이 하나 둘씩 죽어가지만 이상하게도

머리에 ‘악’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국의 전설의 고향이나 여고괴담을 볼 때와는 또다른 느낌이 듭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주온에서 귀신이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려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노려보는 귀신’의 모습은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주온의 귀신은 결코 희생자를 ‘노려보지’ 않습니다.

토시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초점이 없는 검은 눈을 뜨고 있고,

가야코는 도저히 설명 불가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는데,

그 눈은 한국 귀신의 분노나 원망, 슬픔이 아닌, 원한 그 자체입니다.

가야코 역의 배우는 후지 다카코 씨인데,

‘원한’ 연기를 정말 놀랍도록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우주연상을 받아야...)

이 눈빛은 관객이 더더욱 공포이면서도, 악은 떠올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를 더욱 살리는 것은,

이 영화에서 가야코가 매우 잔인하게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로 등장인물들이 결코 잔인하게 죽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는 과정을 보여주지도 않아요. 그냥 없어지거나 할 뿐...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잔인하게 죽으면 관객이 그에게 동정할까봐

감독이 의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 가야코는 잔인하게 죽임으로써 동정의 화살을 오히려 가야코에게 돌리거나,

어디로 보내야 할지 모호하게 연출을 했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사람을 죽이는 이 귀신들이 선은 아니죠.

선악이 없는, 목적이 없는 살인.

이것 역시 ‘누구도 원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감독의 뜻과 일치하며

여기에 주온의 두 번째 공포가 있습니다.

아직 할 얘기는 많지만 글이 너무 길어져서 일단 끊어야겠네요.ㅡㅡ

아마추어의 횡설수설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나머지는 다시 올리겠습니다.